김훈 최질의 난에 대한 평가와 나의 평. 역사

○상장군(上將軍) 김훈(金訓)·최질(崔質) 등이 여러 위(衛)의 군사를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중추원사(中樞院使) 장연우(張延祐)와 일직(日直) 황보유의(皇甫兪義)를 귀양보냈다. 경술년(庚戌年, 1010년 현종 원년) 전쟁 이래로 병력수를 더 늘리니, 이로 말미암아 백관의 녹봉이 부족하였다. 황보유의 등이 건의하여 경군(京軍)의 영업전(永業田)을 빼앗아 백관의 녹봉에 충당시키니, 무관(武官)들은 자못 공평치 못하다는 생각을 가졌다. 최질은 또 변방의 공훈으로서 누차 무관에는 임명되었으나 문관(文官)으로는 될 기회가 없어서 항상 마음에 불평을 품었다. 이 때에 이르러 김훈과 최질 및 박성(朴成)·이협(李恊)·이상(李翔)·이섬(李暹)·석방현(石邦賢)·최가정(崔可貞)·공문(恭文)·임맹(林猛) 등이 영업전을 빼앗긴 것을 가지고 여러 사람들의 분노를 격동시키고 여러 위(衛)의 군사들을 꾀어서 북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대궐 안에 난입하여, 장연우와 황보유의를 결박하고 매를 때려 거의 죽게 하고는, 합문(閤門) 안으로 들어가서 임금에게 직접 호소하기를,
“황보유의 등이 우리의 전지를 빼앗아 차지한 것은 실제 자신들의 이익을 꾀한 것이지 특별히 공가(公家)의 이익을 위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발꿈치를 잘라서 신발에 맞춘다면 사체(四體)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모든 군인들이 흉흉(洶洶)하여 이루 말할 수 없이 분하고 원망스럽게 생각합니다. 청컨대 나라의 좀[蠹]을 제거하여 모든 사람들의 심정을 쾌하게 하소서.”
하니, 왕이 여러 사람의 뜻에 어긋났음을 중시하여, 그들의 청에 따라 장연우와 황보유의를 제명(除名)시켜 유배(流配)하였다.

○을유일(乙酉日)에 어사대(御史臺)를 폐지하고 금오대(金吾臺)를 설치하였으며, 삼사(三司)를 폐지하고 도정서(都正署)를 설치하였으며, 무관(武官)으로 상참관(常參官) 이상은 모두 문관(文官)을 겸하게 하였는데, (이는 모두) 김훈(金訓) 등의 청원에 따른 것이다.

[신(臣)등은 살펴보건대,]
“나라가 나라답게 되는 것은 형정(刑政)이 있고 기강(紀綱)이 있기 때문입니다. 형정이 없으면 능히 착한 사람을 상주고 악한 사람을 벌줄 수가 없게 되어 악한 짓을 하는 자가 많아질 것이며, 기강이 없게 되면 능히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아래 사람들을 부릴 수 없게 되어 신분에 어긋나는 짓을 하는 자가 많아지는 것입니다. 현종(顯宗)은 강조(康兆)가 자기를 왕으로 맞이하여 세워준 계책을 덕으로 여겨 그에게 반역의 죄를 가하지 않았다가, 마침내 강구(强寇)의 변(變)을 자초하여 수레를 타고 파천(播遷)까지 하는 치욕을 당하였으니, 역시 스스로 반성했어야 옳았습니다. 그리고 남쪽으로 순행하게 되어서는 여러 불량한 무리들이 누차 행궁(行宮)을 침범하였으나 모두 방치한 상태로 문책하지도 않고 고식(姑息)적인 은혜를 보였으니, 악한 짓을 하는 자가 어떻게 징계되고 다스려질 수 있겠습니까? 김훈(金訓)·최질(崔質)은 모두 항오(行伍)의 가운데에서 기용(起用)되어 외람되게 여러 장수의 반열에 끼었으나, 문관(文官)이 되지 못한 것을 가지고 억울한 마음을 깊이 품고 괴이한 말을 만들어 여러 사람의 분노를 격동시켰으며, 군사를 일으켜 대궐로 향하여 가서 지존하신 임금을 경동(驚動)시키고 대신(大臣)들을 마구 때렸으니, 음흉(陰兇)함이 극을 다하여 난역(亂逆)이 이미 나타난 것입니다. 임금이 마땅히 대중이 보는 앞에서 (그들을) 죽여 온 나라에 사죄케 해야 옳았을 것인데, 도리어 포학한 기세에 위협 당하여 침묵만을 지키며 손을 모아잡고 앉아서 난리를 평정하여 질서를 회복시키지 못하였으니, 충신(忠臣)과 의사(義士)는 분심(憤心)을 품고 몹시 애석하게 여겼으나, 또한 한둘의 장상(將相)이나 재신(宰臣)들이라도 대의(大義)를 부르짖고 난역(亂逆)을 토벌하여 왕을 호위하는 자가 없었고, 반역자가 태연히 방자하게 굴어도 누가 감히 나무라지 못하였으니, 나라의 형정(刑政)이 있다 하겠으며 나라의 기강이 있다 하겠습니까? 왕이 나약하여 결단성이 없음이 이미 이와 같고 무신(武臣)의 교만하게 날뜀이 또 이와 같아서 위에서는 능멸 당하고 아래에서는 침체되어 다시 떨치어 일어나지 못하였으니, 어사대(御史臺)를 없애고 금오대(金吾臺)를 세웠으며, 삼사(三司)를 폐지하고 도정서(都正暑)를 설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노병(老兵)·추졸(麤卒)들이 모두 문관직을 겸임하여 요직에 포진하고 있어서 기세를 부리니, 종기가 이미 심장에 응결(凝結)되어 거의 약으로는 치료할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후일 서경(西京)에 행행(行幸)할 때, 이자림(李子琳)·김맹(金猛)이 기이한 계책을 바치어 김훈(金訓)의 역당들이 모두 도륙(屠戮)된 것은 다만 한 때의 요행으로 나왔을 뿐이니, 임금이 하늘을 받들어 죄인을 토벌하고 난신(亂臣)을 주벌하여 폭력을 금하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아! 사람들은 한갓 무관들이 문신을 죽이고 스스로 그 관직을 가진 일이 의종조(毅宗朝)에 있었던 것만을 알 뿐이고, 이날 관부(官府)를 바꾸어 놓을 때 이미 화가 터전을 잡게 된 것은 알지 못하였으니, 어찌 현종(顯宗)을 위하여 애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와전된 말로 북산(北山)의 여러 절 중[僧]이 군사를 동원하여 온다 하니, 경성(京城)에서 크게 놀라 경계를 엄중히 하였다

[나의 평]
고려 광종은 과거를 통해 훌륭한 신하들을 배출해 마침내 장헌공 서희와 인헌공 강참찬을 뽑으며 고려의 뿌리를 지켰으나 노비에서 안검된 자들은 본시 경서와 서경 등에 능하지 못한 자들이 여럿이었다.. 더욱이 그들은 본시 노비이나 창칼을 다루는 자들이 꽤 쓸만한 양인들이 많았으니 무예에 능숙한 자들을 과거로 뽑고 경서와 서경보다 더 익히기 쉬운 중국의 병서인 무경을 익히도록 하여 무덕을 쌓은 자들을 늘려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광종은 괴이하게도 이것을 하지 않았으니 노비가 된 자 양인이 되어도 제 아무리 병졸이 된다손치더라도 공을 세워본들 출세의 길은 보장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제 아무리 뿌리를 지켜본들 줄기는 이토록 썩었고 참담하니 비록 김훈과 최질이 난신적자이나 반역 열전에 그들의 이름이 오르지 않은 것은 필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수나라는 무예에 능한 자들을 동네아무개나 뽑고 골라 고구려를 침략했으나 처참한 실패를 맞보고 망하였으며 당나라 태종도 치세를 쌓음에도 이후에 그러한 것을 하지 않았기에 또 다시 처참한 실패를 겪어 후세에 웃음거리를 자랑했다. 이후 당나라 무후가 부끄러운 덕이 많으나 뜯어고치며 전 지역에 무예에 능한 자들을 뽑아 그중에 훌륭한 자들을 뽑아 이러한 일들을 막으며 당 현종의 치세또한 이러한 것이 있었던 것이기에 가능했다. 비록 저 중원을 장악한 당나라는 땅이 넓어 안사의 난이라는 치욕을 당하였고 혼란을 겪으나 망하지는 않았고 송나라 태조가 다시 세워 중원은 이어나가고 이후 무에 관해 다시 정리하여 전조와 달리 제대로 된 무신들을 만들 수 있었다. 이럼에도 고려의 왕들이나 문신들 중 최승로, 김심언이니 하는 자들은 이러한 것을 뜯기는 커녕 하는 것도 없이 겉으로만 보이는 문에 치중하여 요행에 따라 그저 피할 수 있는 시무니 무엇이니 쓰니 이러한 일들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무가 문란해주고 대접받을 자들 못받고 대접받지 않을 자들 대접받고, 상벌의 구별이 없어지니 하공진과 양규같은 무신들을 제외하곤 저런 자들이 나온 것이다. 김훈과 최질의 잘못을 따지기 전에 문신들이 병을 통솔하고 무신들은 저렇게 공을 세워도 상장군만 오를 수 있는 참담하기 그지 없는 병체제를 뜯어고치고 문아에만 치중한 과거에 무를 넣어야 하고 군 행정도 병마와 수군등의 절도사를 만들어야 하나 이또한 없어졌으니 참으로 참담하기가 그지없다. 저 반란으로 인해서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반성하고 잘못을 해야한다 당조(조선조)의 문신들도 이것에 문제를 그 누구도 삼지 않아 추가로 적는 것이다.


고려시대 군인들에 대한 대우가 참 썩고 썩었네요. 지금도 마찬가지로 북괴에 도발에 대응한 장수는 1대 정부부터 지금까지 공을 주기보단 해임을 시켰죠. 그냥 저 고려왕조가 하나부터 열까지 500년과 600년 700년까지 똥이라는 똥은 다 싸는군요. 말이 좋아 고려왕조지 뭐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정권이네요.

이런 왕조는 수나라처럼 한번 역사를 병신으로 만들어놓아야 정신을 차릴 것인데, 조선왕조도 본시 그러려고 했으나 다른 문신들이 가문빨 내세워 욕먹기 싫으니 세가로 만족했지요. 뭐 고려가 병신이니 결국 조선이 병신이 된거군요. 아 왕고 새끼들 진짜 싫다. 다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안드네...한글도 없어 토지제도도 더 썩었어 더 문치주의에 진짜 누구 말대로 없는게 낫네.









 


덧글

  • 도종환과 먼산족 2017/06/19 17:48 # 답글

    왕씨왕조의 출발은 그래도 신라왕조의 모순을 극복하고 역사를 발전시킨 면이 있는데 저런 부정적인 면도 있군요.
    지금에 와서 보면 무엇보다 고려계승론을 내세운 게 민족정체성을 흐리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봅니다.
    물론 당시에는 왕조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불가피했다고는 생각됩니다.
    어쨋든 근래 고려계승론을 부정하는 학자들이 좀 나오네요.
    김한규, 임지현, 이전, ...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828
  • 내눈을바라봐 2017/06/20 08:24 #

    신라의 경우는 제도가 썩고 땅이 적긴해도 해상권으로 돌아선 나라고 더구나 최대적국이 왜구였기에 수군의 중요성을 잘 알죠. 근데 그 수군을 쓰잘데기없이 적국인 거란이다 뭐다해서 신라때와 달리 수군 육성을 하지 않은 것이죠. 육군으로 했고. 즉 땅에서 지키거나 육군으로 밀어야한다는거죠. 물론 점령은 육군이 하나 그 유지나 보급은 육군으로는 한계가 엄청나죠. 저 시절 거란은 말로 밀어버리고 약탈해버리면 끝나죠. 그런데 해상은 말보다 배이기 때문에 거란은 바다에서 싸운적도 별로 없고 바다전술없는 애들이 이길 가능성이 없죠. 한국 3면은 유속이 심한데 본시 3면인 나라는 수군을 키우고 해상권 즉 제해권 장악이 생명인데 해상능력과 수군 중 신라-고려-조선중 고려가 가장 참담하죠. 벽란도 무역 어쩌구 저쩌구 하는데 해전에서 오백년가까이 날려쳐먹은 배만 수십에서 수백이죠. 본시 나무는 이런 배를 만드는데도 써야하나 문벌이나 최충헌같은 자들이나 권문세가들 나무쓰는데 도배했죠. 툭 까놓고 신라계열 사람들은 거란보단 왜구를 적으로 삼길 바랬는데 알다시피 이전 신라 왕족들이나 6두품 출신들은 제일 앙숙인게 왜구였죠 본시 반일감정의 원조도 신라였죠. 그 신라 속에 나온 유학자들이야 말할거 없구요. 삼국사기만봐도 왜구에 대해서는 혹평을 쏟아내죠. 왜구를 적국으로 해서 제해권을 장악하는게 제일 좋지 병신찐따 왕씨고려들 하는거 보면 답도 안나오죠. 선박기술로 먹고살 나라가 선박으로 쳐바르고 퇴로 막고 보급로 끊을 나라가 육군에 퍼부으면 말이 있나 뭐가 있나. 답도 없죠. 수군을 통해서 바다건너 송이나 어디든 보급받아도 저렇게 처참히 박살이 안나죠. 뭐 동여진이나 거란을 수군으로 발랐다는데 신라에서 해전에서 승률이 제일 바닥인게 고려 수군이죠. 고려군하면 육군을 떠올리지 수군은 안떠올리죠
  • 도종환과 먼산족 2017/06/19 17:55 # 답글

    먼산족들이 도종환 문제를 가리려고 그러는 것인지, 생뚱맞게 역사에 관한 명언을 가지고 트집을 잡네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나라는 인간에게 있어 몸과 같고 역사는 혼과 같다.'

    이 좋은 말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면 되지 누가 했는지가 중요합니까?
    어차피 명언이라고 돌아 다니는 말들이 대부분 엉뚱한 사람이 한 것으로 잘못 알려진 게 많죠.
    '누가' 말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을 말했는지가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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