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통감의 문제점과 장점. 역사



문제점

[신(臣)등은 살펴보건대,]
“김부식은 김부(金傅)가 전씨(錢氏)에 비하여 공덕(功德)이 훨씬 낫다고 하였는데, 무엇을 보고서 그런 것입니까?
오월(吳越)은 송나라에 대하여 번신(藩臣)의 직무를 수행하며 받들어 군신(君臣)의 구분이 정하여져 있으나, 신라는 고려에 대하여 이와 같지 않았습니다. 대개 태봉(泰封)은 신라의 반적(叛賊)이요, 고려 태조는 태봉의 신하였으니, 비록 태봉이 무너지고 고려의 운수가 날로 번창한다고 하나, 신라는 고려에 대하여 일찍이 무릎을 굽혀 번신이라 일컬은 적이 없었는데, 하루아침에 종묘사직을 버리고 땅을 바치면서 북면(北面)하여 조회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전씨(錢氏)는 전류(錢鏐) 때부터 황소(黃巢)의 난을 기화로 비로소 오월에 웅거하면서 대를 이어오다가, 오계(五季)를 지나 송나라 태종(太宗) 때에 이르러서 13주(州)를 바치고, 그대로 머물러 숙위(宿衛)하였으니, 누대(累代)를 번신으로 지내다가 하루아침에 순리에 따라 토지를 바친 것이므로, 이는 제후(諸侯)가 몸을 굽히고 (자신을) 욕되게 한 것에 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김부(金傅)는 비록 역적 견훤이 왕위에 세워 주었기 때문에, 쇠미(衰微)하여 떨치지는 못하였으나, 신라는 세 성(姓)이 서로 왕위를 이어 거의 1천 년이 지났으니, 그 깊은 인애(仁愛)와 후한 은택으로 충분히 인심을 굳게 단결시킬 수도 있었을 텐데, 신하나 백성이 어찌 스스로 안정하고 스스로 정성을 바치기를 삼인(三仁, 미자(微子)·기자(箕子)·비간(比干))과 같이 하고, 선왕(先王)의 은택을 생각하여 잊지 않기를, 은(殷)나라의 백성과 같이한 자가 없었겠습니까? 더구나 왕자(王子)가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을 논하여 반복해서 간절히 간하였는데도, 어찌하여 경순왕은 효자가 간하는 것까지 뿌리치고, 1천 년 조종(祖宗)의 소중한 기물[重器]과 수천 리 영토를, 머리를 조아리며 두 손을 모아 공손하게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단 말입니까? 경순왕이 고려에 대하여 미약해서 힘을 쓸 수 없고, 위태하여 스스로 보존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선을 행하여 스스로 강해지면서 천시(天時)를 기다리는 것이 옳을 것이며, 만약 어쩔 수 없는 형편이라면, 살아 남은 무리를 규합하여 성(城)을 등지고 사직(社稷)을 위하여 한 번 죽기를 각오하는 것이 옳았을 터인데, 도리어 살펴 깨닫지 못하고 자신이 항복한 포로가 되어, 북면(北面)하고 신하라 칭하며, 고려의 궁궐 뜰에서 포복 진퇴(匍匐進退)하였으니, 그가 진(晉)나라 민제(愍帝)4)나 오(吳)나라 손호(孫皓)5)와, 다를 것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뒤에 비록 부귀를 누리고 권세가 대단했으며 외손이 번성했다고 한들, 어찌 능히 나라를 망하게 하고 자신을 잃은 큰 수치를 씻을 수 있겠습니까? 경순왕과 같은 사람은 큰 절의를 이미 잃었으니 나머지는 본받을 것도 없는데, 김부식이, ‘전(錢)씨와 대등하다’ 한 것은, 도대체 무엇을 보아서 그렇다는 것입니까?”


아울러 고려 태조의 평가이다.

“태조(太祖)는 뛰어난 무용(武勇)과 영웅적인 자질로서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들을 편안케 할 방략(方略)을 품었으므로, 하늘이 돕고 사람이 돌아와 드디어 대위(大位)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호걸들을 모아 결집하고 주변의 강토(疆土)를 개척해서 위덕(威德)이 널리 퍼지어 먼 곳에서까지 인심이 돌아오니, 역적 견훤(甄萱)이 무릎을 꿇고서 내조(來朝)하고, 김부(金傅, 경순왕)가 속수무책으로 국토를 바치게 되었습니다. 신라와 백제를 평정하여 삼한(三韓)을 통일하였으니, 그 공적이 얼마나 성대한 것이겠습니까? 비록 전쟁을 겪으며 나라를 새로 창업할 때라 아직 모든 제도를 정비할 겨를이 없었지만 그 규모야말로 원대한 것이었습니다
 
국역 동국통감에 나온 이야기인데. 당시에 경순왕의 후손들이 뻔히 있음에도 저런 앞뒤가 이상한 글을 썼는지 이해불가다
충암 김정 선생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있을 것이다.
다 하나같이 집안도 집안이나 머리도 좋은 양반들이었다. 당시 경순왕의 후손들과 이후 후세들이 저걸 다 볼텐데, 뒷감당은 어찌하려고 저런 글을 적는지 모르겠다.

특히 촉의 유선과 오나라의 손호랑 비교하는 것은 진짜 너무 막나갔다고 본다. 물론 고려 태조도 옛 고구려 그리고 옛 백제는 물론 신라까지 다 포함시키고 삼한을 통일했다. 근데 왜 이렇게 앞뒤가 다른 글을 썼을까? 마의태자의 그 충심은 좋다 허나 이미 신라는 800년대 망했다. 비록 신무왕과 장보고가 힘을 합쳐 나라를 다시 세웠으나 안타깝게 신무왕은 왕을 6개월만 했다. 그리고 장보고는 죽었다. 이미 그때부터 신라는 멸망했다.
 
이건 뒤집어 생각해보자. 이유는 고려말만 봐도 그렇다 파죽지세의 명나라가 뜨는 상황 속에서 고려의 왕들과 권문세가들은 명나라 사신 김의를 죽이고, 북원과 붙어먹고, 대토지를 점유하고, 한번 해먹은거 계속 해먹으려고 했다. 결국 백성들의 지지는 바닥이었다.이후 왜구들이 미친듯 쳐들어오고 농번기와 장마철에 군대를 일으켜 만주를 도모하려고 했다. 그것이 요동정벌이었다. 나라의 꼴아지는 더 말이 아니고 결국 일어난 것은 위화도회군으로 위화도회군 이후에도 우왕과 권문세가는 왕위에 물러나고 대토지를 내놓아고 관직에서 줄로 내려가야 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전부터 꿀빤게 있는지 계속해서 버티고 또 버티다가 마침내 혼군 우왕은 죽었고 권문세가는 신진사대부의 손에 처참히 쫓겨났다.

그리고 이쯤되면 고려도 조선에게 하루 빨리 줬어야 했음에도 이후 포은 선생은 무슨 생각으로 계속 고려를 유지하려고 했을까.
이것에 대한 조선 태종의 말이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 같이 얽혀서 백년까지 누리리라"

고려를 유지하고 싶으면 우왕과 권문세가들은 위화도회군 이후 그냥 토지고 뭐고 나발이고 내려놓고 스스로 물러나야 했다. 그렇게 위화되회군 이후 조선의 태조 즉 이성계 장군이 압도적으로 성을 칠 지경이면 우왕은 싸울 생각을 접어야 했는데도 싸웠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이 죽었다.

경순왕과 달리 고려의 마지막 왕 우왕은 이렇고 권문세가들도 이러했다. 이걸 뻔히 알고도 저런 사관을 쓴것은 잘못이다.
본인들도 고려 태조가 삼한을 통일했다고 한다. 위대하다고 한다. 근데 왜 쓸데없는 글을 적었는지 모르겠다.

사실 경주김씨의 세도정치도 이런 역사책의 악영향이 영향을 끼쳤으리라 본다.

툭까놓고 저렇게 사관을 불안정하게 쓰면 도움될건 없고, 그냥
"경순왕을 전씨에 비해 공덕이 더 낫다니 뭐니 할 것은 없다. 하지만 백성들의 지지를 잃고, 신하들까지도 동요하고, 삼한의 새로운 주인이 나타남에 있어 새로운 시대에 왕에게 줬으니 경순왕을 탓할것도 마의태자를 탓할 것도 없을 것이다. 고려의 마지막 왕인 신우(우왕이 맞지만 동국통감에선 신우라고 하니 신우라고 할께요.)는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서 내려오지 않았으니 그보단 나을 것이다. 신라의 왕이 고려에 투항을 하자 고려태조 이후 몇백년뒤 고려의 왕들은 선대왕이 왕위를 통채로 받았다고 고려 태조와는 매우 자만하여 자화자찬하며, 황제라고 자화자찬하며 황제라는 것이 뺏기자 또 그것에만 집착하느라 교만에 빠졌다. 정작 백성들의 원성을 숱하게 받아 백성들의 온갖 지탄을 받은 왕들은 책임지고 내려오는 왕들이 없었으며 특히 의종과 충혜왕과 신우는 그 정도가 심했기에 강제로 쫓겨나게 되었다. 경순왕 김부의 투항은 불가피하고도 부득이했던 것은 물론 백성의 지지를 받지 못했던 왕이다. 앞전에 진성여왕도 비록 무능하고 무능하나 그또한 책임지고 왕에 내려왔다. 후한서 효헌제기 이는 논(論)한다. 전(傳)에서 이르길 정(鼎, 왕업을 상징하는 세발 솥)이라는 기물은 비록 크기는 작으나 무거우므로 신(神)이 보배로이 여기어 함부로 빼앗아 옮길 수 없다 하였다. 위나라가 짊어지고 가버리게 되었으니 이는 또한 한나라의 천운이 다한 귀결이로다! 하늘이 한나라의 덕을 미워한 지 오래되었으니 산양공을 어찌 꾸짖겠는가! 라고 했으니 결국 경순왕의 운명도 그와 같을 것이다. 참으로 불행한 왕이라고 볼수 있다."

이런 것을 보면 고려의 의종, 충혜왕, 우왕 3대 암군과 이후 연산군도 선조,인조도 전란이 끝나자 그냥 내려올 상황에서 무슨 염치로 앉아있었는지 난 모를 지경이다. 백성들의 고통은 가중된 판국에 저러한 글을 적었기 때문에 너무나도 답이 없다. 이런 글은 심사숙고로 적었어야 했다. 고로 경순왕과 마의태자의 논쟁은 아무 의미가 없다.오히려 후세에 악영향을 끼쳤다.
참고로 나는 고려태조의 시각에서 바라보지 두 사람의 시각에선 보질 않는다. 물론 고려태조 본받지도 않고 폭군으로 떨어진 의종, 충혜왕, 우왕은 답이 없을 지경이다.


사실 경순왕과 마의태자의 논쟁은 저곳에서부터 시작되었으니 참 후세에도 저런걸 남기니 답이 없다.

장점

[신등은 살펴보건대,]
“사람을 잘 관찰하는 자는 그가 세운 공(功)의 성취와 실패를 관찰하지 않고, 그가 행하는 일의 옳고 그름과 마음쓰는 것의 사악하고 올바름을 관찰합니다. 마음이 진실로 올바르고 일이 진실로 옳다면 비록 공을 이룩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또한 취할 만하니, 김보당 같은 인물이 그런 예입니다. 그가 동남에서 군사를 일으켰을 때에 강개(慷慨)하고 발분(發憤)하여 반란을 일으킨 역적들을 토벌하고 군부(君父)를 구원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으니, 그의 마음씀을 올바르지 않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가 이경직·장순석·유인준의 여러 무리들과 함께 전왕을 받들어 대의(大義)를 일으켰으니, 명분과 의리가 바르고 순하였으며, 일 또한 옳은 데서 출발하였다고 말할 만한 자인데, 불행하게도 패배하여 자신이 죽는 데 이르렀으니, 참으로 애석하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그가 죽음에 임박하여 말한 한마디는 다시 문신들에게 화를 입히게 되어 산 자가 없게 만들었으니, 그 처음부터 끝까지 절개를 온전히 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큰 강령이 이미 올바랐으니, 어떻게 성취와 패배를 가지고 사람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김보당 같은 현명한 자가 오히려 열전(列傳)에 들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은 의종의 폐위될때 소위 계사의 난 즉 김보당의 난이다. 고려사에 열전에 들지 않은 것부터 이상하다. 무신정권 인간들의 하는 짓거리를 보고 의종기가 나을만큼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는 광해군의 예만 봐도 그렇다. 이후 인조가 할말없게 만드는 무능하고 한심한 짓으로 비난을 많이 당해도 광해군의 복위 운동은 저렇게 일어나야 정상이고 다시 광해군과 그 광해군 관련 왕족을 올려야 했다 뭐 광해군은 지금도 논란이나 인조는 그냥 논란이고 뭐고 할것이 할말이 없는 왕이었다.

이제 의종의 이야기를 해보자. 툭까놓고 공예태후와 그 일가도 내려왔어야 했다. 무인시대에서 공예태후를 보며 괜찮은 왕비라고 생각했는데, 실상을 보니 이게 어머니인지 의문이다. 제일 먼저 후사 문제에서 왕의 결정에 오히려 둘째를 밀어 의종에게 미움을 당하고 이후 어찌된 영문인지 공예태후와 그 일가는 다시 대접받아 의종을 밀기로 했다. 그 일가 중 한명인 임원후는 왕의 특혜를 받아 문신들에게 숱한 지탄을 받으니 정말이지 할말이 없을 지경이다. 그리고 무신정권이 터지자 공예태후와 그 일가는 의종과 같이 책임지고 물러날 생각은 죽어도 없었다. 이후에도 그들은 살기 급급해 의종을 폐위하는데 동참하고 명종을 올렸으나 또 명종과도 등돌리고 화해하길 반복하니 문신들과 무신같지도 않는 무신들과 더불어 매우 큰 책임이 있다. 실제로 공예태후가 있을때는 수습은 커녕 나라의 상황은 매우 엉망이었다. 이런 어머니가 있기 때문에 의종이 더 폭군이 되는 것이다. 고려조에서 최악의 왕비로 꼽자면 난 단연 대목황후, 헌애왕후, 공예태후 3대로 꼽고 대목황후도 노비안검법을 해서 부곡의 정리도 하려고 했을때 맹렬하게 반대할만큼 답이 없었다 물론 헌애왕후, 공예태후는 그냥 말할 것도 없이 최악의 왕비였다. 문정왕후, 명성황후가 그들의 영향을 받았는지 아니면 그들은 그들때로 또 노답인지 헌애왕후, 공예태후도 그들과 다를게 없다.

사실 무신정권의 책임에서 의종은 폭군이나 주변에 신하라는 자들과 태후까지 모두가 책임을 질만큼 답이 없었다. 설령 대령후가 그 자릴 앉아도 상황은 다를게 없다. 그리고 공예태후는 도참설이니 뭐니 해서 왕비가 되어 정상적으로 뽑힌 왕비가 아니였다. 이런 왕비의 아들들이 폭군이 되거나 암군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고로 김보당의 난은 김보당이 비록 잘못한 점이 있으나 이것만 봐도 이해가 되니 열전에 올려야 하는게 맞다.


장점

국역 동국통감은 많은 양반들이 수고에 수고를 거듭해 쓴 책이나 결국 잘못된 것을 많이 고쳤다. 특히 대광현의 투항 시기가 고려사에선 앞뒤가 맞지 않았는데 920년대인지 930년대인지 앞뒤가 맞지 않으나 920년대로 했다. 

"그러나 그의 귀화한 시기에 대하여는 기록마다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즉, 『고려사(高麗史)』 태조 세가에는 934년 7월로, 『고려사』 연표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는 925년, 『동국통감(東國通鑑)』에는 926년으로 되어 있다. 오늘날 태씨(太氏)는 대부분 그를 시조로 하고 있다." 라는 것을 동국통감은 확정했다.

○거란(契丹)이 발해[渤海]를 멸망시켰다. 거란주[契丹主]가 지난해 겨울부터 발해를 침략하여, 서쪽 변방의 여러 부(部)를 공격하고는, 드디어 진군(進軍)하여 부여성(扶餘城)을 포위하였다가 이때에 이르러 함락시켰다. 드디어 진군하여 홀한성(忽汗城)을 포위하니, 발해왕 대인찬(大諲譔)이 싸움에서 패배하여 항복할 것을 청하였다. 거란주가 병사들에게 대인찬과 그 족속(族屬)을 호위하여 성을 나가도록 명하고는, 발해를 고쳐 동단국(東丹國)이라 하고, 홀한성을 천복성(天福城)이라 하였으며, 태자(太子) 배(倍)를 책봉하여 인황왕(人皇王)이라 하여 그를 임금으로 삼았으며, 대인찬을 임황(臨潢)의 서쪽에 두고는, ‘오로고(烏魯古)’라는 이름을 내렸다. 이에 발해왕의 세자 대광현(大光顯)과 장군 신덕(申德), 예부경(禮部卿) 대화균(大和鈞), 균로사정(均老司政) 대원균(大元鈞), 공부경(工部卿) 대복모(大福謨), 좌우위 장군(左右衛將軍) 대심리(大審理), 소장(小將) 모두간(冒豆干), 검교개국남(檢校開國男) 박어(朴漁), 공부경(工部卿) 오흥(吳興) 등 남은 무리를 거느리고, 전후로 고려에 도망하여 온 자가 수만 호였는데, 왕이 그들을 매우 후하게 대우하였다. 대광현에게는 왕계(王繼)라는 성명을 내려 주고, 종적(宗籍)에 붙여서 선대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요좌(僚佐)들에게도 모두 벼슬을 주었다.


이것으로 발해는 고려왕조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동국통감을 통해 확정할수가 있었다. 아울러 고려 태자가 송의 왕족이라니 뭐니 헛소리도 그만둘 수 있었다.

또 하나의 장점

[신(臣)등은 살펴보건대,]
“이제현(李齊賢)이 거란[契丹]을 대우한 방도에 대해 논하기를, ‘왕가도(王可道)가 화친(和親)을 끊자고 건의한 것은, 황보유의(皇甫兪義)가 우호를 지속하여 백성을 안식(安息)시키자고 한 주장만 같지 못합니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충선왕의 물음에 대답한 것은 다만 낙타 만을 논하였고, 태조가 화친을 끊은 실수는 말하지 않았으니 어찌 된 것입니까? 전사(前史)에는 화친을 끊은 것으로써 태조의 성덕(盛德)의 일로 삼아 찬양하였는데, 신은 마음속으로 의심이 갑니다. 대체로 보아 이웃 나라와 사귀고 먼 곳의 사람을 회유(懷柔)하며, 국경을 공고히 하고 사명(使命)에 신중을 기함은 곧 만세토록 나라를 보호하는 훌륭한 계책입니다. 지금 고려 태조는 신라를 항복 받고 후백제를 멸하여 겨우 삼한(三韓)을 통일하게 되어서 흩어진 자가 다 모이지 못하고 부상자는 다 일어나지 못하였으며, 제도나 경영을 처음 시작하느라 겨를이 없으니, 정작 강성한 이웃 나라와 화합하여 장원한 생각을 가지고 뒤돌아볼 때입니다. 거란은 대대로 유(幽)·연(燕)·요(遼)·계(薊)의 땅을 점거하여 나라와 군사가 부강해 지자, 중원(中原)의 혼란을 엿보아서 모조리 빼앗아 전부 차지하려는 뜻을 가지고 한창 사나운 기세를 펼치는 발해(渤海)를 마치 마른 나무 꺾듯이 쉽게 차지하였으니, 그들이 새로 창립한 고려를 보고서 어떠한 것으로 알았겠습니까? 그러나 오히려 우리에게 먼저 교빙(交聘)을 맺으려고 하였으니, 노려보는 불측한 마음이 없는지 어찌 알았겠습니까? 그들이 보내 온 사신을 예로써 대우하고 정성으로써 접대함으로 인하여 동맹의 우호를 성실히 맺는 것이 어찌 나라를 보호하는 좋은 계책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태조의 생각이 이에 미치지 못하였으니,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거란이 발해에게 신의를 잃은 것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기에 발해를 위한 보복으로 그 사신을 거절하여 심하게는 바다의 섬으로 귀양보내고, 그 낙타를 물리쳐 심지어 굶겨 죽게까지 하였으니, 이는 다만 거절하는 데 그쳤을 뿐 아니라 거절하기를 원수와 같이한 것으로, 그들이 우리에게 원수로 갚을 것은 괴이할 만한 것이 못되었습니다. 이로부터 변경(邊境)에 흔단이 날로 깊어져서 정종(定宗) 때에는 광군사(光軍司)를 두어 변경의 방비로 삼았으니, 그 화는 이미 시작이 된 것이었습니다. 성종(成宗) 때에 이르러서는 소손녕(蕭遜寧)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침입하여 땅을 차지하려고 항복을 요구하므로 화친을 청하였으나 그 전화는 이미 요원(燎原)의 불길처럼 번져 갔습니다. 현종(顯宗) 때에 이르러서는 글안의 임금이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적(賊)을 토벌한다 말하면서, 실은 우리나라를 침략하여 빼앗으려는 목적으로 숙주(肅州)를 무너뜨리고 서경(西京)을 격파하여 승리의 여세를 타고 몰아쳐 들어오므로, 도성을 보존할 수가 없어서 임금의 수레를 남쪽으로 옮겼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았음이 실낱 같았으며, 그 화가 이미 하늘에 치달았습니다. 급기야 사신을 보내 강화(講和)하여 신하라 칭하고 정성을 바쳐 복종하게 되자, 변경(邊境)을 걱정하지 않고 백여 년을 지냈습니다. 고종(高宗) 때에 내려와서는 그 유종(遺種)인 금산(金山)·금시(金始)와 같은 자들이 잔당(殘黨)을 취합(聚合)하여 하삭(河朔)의 백성들을 협박해 몰고와 압록강을 건너서 산성과 진영을 함락시키어 환란이 몹시 심각하였으나, 군사를 부지런히 동원하여 두어 해가 지난 뒤에야 능히 소탕하여 화란(禍亂)을 비로소 종식시킬 수 있었습니다. 만약 거란이 금병(金兵)으로 인해 망해지지 않고 몽고(蒙古)로 인하여 섬멸되었다면, 고려의 존망 성패(存亡成敗)는 또한 예측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연유를 추구하여 보면 모두 고려 태조가 강성한 도둑을 대처하는 데에 그 방도를 잃고, 화친을 무시해 끊은 소치로 그런 것이니, 후손에게 물려 줄 계책의 실수를 이루 다 한탄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비판한 것을 잘했다. 일찍이 아편전쟁으로 조선왕조는 영국이 한참 사나운 기세로 청나라를 꺽을때 조선왕조가 이후 영국과 미국에게 방도를 잃고 무의미한 대항을 한것과 거의 비슷하니 이것은 굉장히 잘지적했다. 이후 고려태조와 호족들의 방도를 잃은 것은 서희의 담판외교로 논파가 되었다.

서희가 말하기를,

“신하가 임금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절을 하는 것이 예의이지만, 두 나라의 대신이 서로 만나 보는데 어찌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하며, 두세 번 오갔으나 소손녕이 허락하지 않자, 서희가 화를 내고 돌아와서는 관소(館所)에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소손녕은 그리하여 (서희가) 당(堂)에 올라와 예를 행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서희가 이에 영문(營門)에 도착하여 말에서 내려 들어가, 소손녕과 함께 뜰에서 (서로) 읍(揖)하고 당에 올라가 예를 행한 다음, 동서(東西)로 마주 대해 앉았다. 소손녕이 서희에게 말하기를,

“그대의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高句麗)의 땅은 우리의 소유인데, 그대의 나라가 (우리나라를) 조금씩 조금씩 개먹어 들어오고 있다. 또 우리와 국토를 연접해 있으면서 바다를 건너 송(宋)나라를 섬기니, 대국(大國, 거란을 말함)이 이 때문에 와서 토벌하는 것이다. 이제라도 땅을 떼어 바치고 조빙(朝聘)을 닦는다면 무사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서희가 말하기를,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곧 고구려를 계승한다. 그러한 까닭에 국호를 고려(高麗)라 하고 평양에 도읍한 것이다. 만약 땅의 경계를 논한다면, 상국(上國, 거란을 말함)의 동경(東京)도 모두 우리의 경계 안에 있는데, 어찌 그것을 침식해 들어간다고 할 수 있는가? 그 밖에 압록강의 안팎도 역시 우리의 경내(境內)인데, 지금 여진(女眞)이 그 사이에 부당하게 점거하여 완악하고 교활하게 변덕을 부리면서 길을 막아, 심지어는 바다를 건너서 가게 하였으니, 조빙을 통하지 못한 것은 여진 때문이다. 만약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다시 찾아 성보(城堡)를 쌓고 도로를 통하게 한다면, 감히 조빙을 닦지 않겠는가? 장군이 만일 신하의 말로써 황제에게 아뢴다면, 어찌 딱하게 여겨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하며, 말씨가 강개(慷慨)하니, 소손녕이 더 억지를 부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드디어 자세히 (그러한 내용을) 위에 아뢰었다. 거란의 황제가 말하기를,
“고려가 이미 화친을 청하였으니, 의당 군사를 철수하라.”
하였다. 소손녕이 위로연(慰勞宴)을 베풀려고 하니, 서희가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비록 실수한 일은 없지만, 상국(上國)의 군사들이 수고스럽게 멀리까지 오게 되었으므로, 상하(上下)가 쉴 틈도 없이 병기(兵器)를 가지고 한데서 여러 날을 지내고 있는데, 어찌 차마 연회를 즐길 수 있겠는가?”

하니, 소손녕이 말하기를,
“두 나라의 대신(大臣)이 서로 만났는데, 경하하는 예가 없어서야 되겠는가?”
하고 굳이 청하여, 그런 뒤에 (마지 못해) 연회를 허락하였다. 한껏 즐기고서야 연회가 끝났는데, (서희가) 돌아올 때는 소손녕이 낙타 10마리, 말 1백 필, 양(羊) 1천 두(頭), 무늬 놓은 옷감을 합쳐 5백 필을 주었다. 서희가 거란의 진영(陣營)에 머문 지 7일 만에 돌아오니, 왕이 크게 기뻐하여 강가에 나가서 맞이하였다. 곧 박양유(朴良柔)를 예폐사(禮弊使)로 삼아 보내어 (거란의 임금을) 알현케 하였는데, 서희가 다시 아뢰기를,

“신(臣)이 소손녕과 더불어 약속하기로는, 여진(女眞)을 소탕하여 평정하고 옛 땅을 수복(收復)한 뒤에야 조현(朝見)하는 길이 통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제 겨우 압록강 안 쪽으로만 수복하였으니, 청컨대 압록강 밖의 수복을 기다린 뒤에 조빙(朝聘)을 행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왕이 말하기를,
“오래도록 조빙을 행하지 않으면 후한이 있을까 두렵다.”
하고, 드디어 박양유를 보냈다.

[신(臣)등은 살펴보건대,]
“큰 기회를 포착하기란, 털끝만큼도 들어갈 틈이 없는 것이니, 오직 호걸(豪傑)스럽고 밝은 지혜가 있는 선비라야 사세(事勢)를 잘 살피고 헤아려서 기회를 잃지 않고 큰 공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위(魏)나라 무제(武帝)가 형주(荊州)로 쳐내려갈 때, 주유(周瑜)2)가 없었더라면 삼오(三吳, 중국 강동(江東) 일대를 칭함)의 땅은 이미 손권(孫權)의 차지가 되지 못했을 것이고, 부견(苻堅)이 진(晉)나라를 침략할 때, 사현(謝玄)3)이 아니었다면 양자강(楊子江) 동쪽의 땅은 또한 진나라의 소유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송(宋)나라 경덕(景德) 연간(年間)에 거란이 남쪽으로 침략하여 옴에 온 나라가 놀랐으며, 여러 신하들이 헌의(獻議)하여 혹은 금릉(金陵, 지금의 남경 부근)으로 행차하기를 청하고 혹은 성도(成都, 지금 사천성(四川省)의 수도)로 행차할 것을 청하였으나, 산처럼 홀로 우뚝서서 황제에게 친정(親征)을 권유한 것은 구준(寇準)4)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경력(慶曆) 연간에 거란이 재차 침략해왔을 때는 여러 신하들이 두려워서 감히 보빙(報聘, 이웃나라의 방문에 대한 답방)을 가지 못하였는데, 다만 하나의 수레로 오랑캐의 조정에 들어가 언변으로써 방패와 창을 대신하여 을렀다 눙쳤다 해서, 나라의 근심을 풀게 한 것은 부필(富弼)5)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만약 구준이나 부필이 없었다면, 남북(南北)이 둘로 갈라져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세상에서는 한갓 송나라의 구준과 부필이 있는 줄만 알았지, 고려에 이미 서희(徐熙)가 있었다는 것은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거란이 그들의 군사가 많은 것만 믿고 우리에게 싸움을 걸어서 나라를 집어삼키겠다는 마음으로 시끄럽게 구는 것을 멈추지 않다가, 바야흐로 소손녕이 침략해 들어와 봉산(蓬山)을 격파하고 선봉(先鋒)을 포획하여, 위세를 크게 떨치며 공갈(恐喝)로 항복하라고 위협했습니다. 성종(成宗)이 서도(西都)에 행차했다가 서울로 급히 돌아오니, 여러 신하들이 헌의하기를 혹은 항복하기를 구하고 혹은 땅을 떼어 주자고 하였습니다. 성종이 장차 땅을 떼어 주자는 의견을 따르려고 하였으니, 그 계책이 큰 실수인데도 여러 신하 중에 감히 논박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서희만이 유독 불가함을 강력히 진달(陳達)하며 거란과 한 번 싸우자고 하였으니, 곧 구준(寇準)의 친정(親征)하자는 계책이었습니다. 거란에 사신으로 가게 되어서는, 서로 대등한 예(禮)로써 굴하지 않으니, 강경한 오랑캐도 두려워서 굴복하여 마침내 화친을 강구하였습니다. 그가 사신의 일을 봉행함에 체통을 얻었으니, 또 어찌 부필(富弼)에게 밑돌겠습니까? 그 당시에 만약 서희의 계책이 없어서 한 번 기회를 잃었다면 절령(岊嶺) 이북을 다시 보존할 수 있었겠습니까?”

사실 애초부터 청나라는 여진족으로부터 시작되었지 한족으로 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다. 직접 아편 전쟁이 끝나저 영국에 가서 저러한 담판을 지었어야 한다.  그래서 청나라는 명나라를 침략하고 조선을 침략해 온갖 해악을 끼친 여진의 후예라고 했어야 했고 온갖 오랑캐들이 다 몰아낸 조선의 태조를 어느 왕자가 본받아 많은 준비와 준비를 하며 아편전쟁에 가담하고, 그리고 조선에 복귀해 아편전쟁이 시작될쯤에 그랬어야 했다. 실제로 태조 이성계도 본시 원나라가 강해서 원나라에 의탁했으나 원나라가 멸망하고 마침내 이후 숱한 군공을 세워 조선이 탄생했다. 더 아쉬운 것은 태조실록이 등한시 되었던 것이다. 

뭐 이건 논란이 될수 있으니 좀 더 이야기를 하자면

다시 만부교 사건과 저 서희의 담판외교로 넘어가면 만부교 사건은 엄청난 실패작이고 서희의 담판외교는 성공했다. 단지 강동 6주만 얻었을뿐 여진을 쫓아내는 것은 예종기에 잠시 이루어지다가 이전부터 치밀한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동북 9성을 되돌려줬다. 결국 서희의 바램대로 되질 못했다. 4군 6진과 비교해선 툭까놓고 4군 6진이 낫다. 이유는 짱깨가 장백산이라고 우겨대는 백두산을 탈환한게 세종과 최윤덕 장군의 노고가 있기 때문에 그러했고, 그러기 때문에 백두산은 제 아무리 못나도 이걸 했던 조선왕조를 씹어대고 또 씹어대는 북괴땅이 아니라 우리의 땅이기 때문이다.


어찌되었건 이 책이야말로 그 팔만대장경이나 그걸 보관했다는 뭐시기보단 더 낫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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