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왕조가 황제가 아닌 왕? 무조의 명칭은? 역사

"음탕 방자함이 당나라 무조보다 더하여 나라의 기반을 잃게 되었으니." 동국통감
이 논리대로라면 명나라 마황후 => 명나라 마수영 => 명나라 주원장

이제까지 있던 중국 황후는 죄다 쳡년 내지는 후궁.

그리고 측천이 황제를 칭했다고 욕먹었다라
음탕 방자라 명태조가 몸담던
홍건적은 고려에 큰 해악을 끼친 집단
송태조가 몸담던 절도사는 반란군.
음탕 방자라.
수나라는 당고조 당태종이 뒤집었음
하지만 어느 누구도 역성혁명이라고 보기 이상함
결국 수나라명칭을 없애야함.아니면 당나라가 정통성이 없어지거나

그리고 무조 드립치지만
정작 균전제 회복하고 무과도입하고 과거제도 이렇게 틀을 다 짠거도 측천무후
균전제는 본시 유교가 말한 정전제가 시초임
무과도입이나 과거제도 회복도 인재를 널리등용하라는 공맹의 이념임 측천무후가 했음.

무조발언이 결국 황제국이라고 했던 중국은 황제국이라고 할 근거가 내려가는게 먼저 측천무후의 황후관직을 삭탈했기때문임. 이때문에 이제까지 황후붙인 애들 죄다 첩이나 궁녀로 떨어질 판국임.
역사라는게 참 웃기고 웃기네. 이것뿐만 아니라 여와씨라고 한것도 그럼.

이건 이덕일 사이비 사관대로 떠드는 문제가 아니라. 그냥 동아시아에 사관을 기록한 인간들이 이렇게 앞뒤를 못맞추니 문제
중국에서 진나라가 황제국이라고 해도 정작 진나라는 한나라로 인해 정통성이 부정됨.

"그리고 가장 결정타는 존황양이가 아니라 존왕양이임"

중원이 만든 유교의 적은 유교라는 사상이 곳곳에 있구만 황제칭호도 웃긴게 존황양이라고 안하고 존왕양이라고 하는데 존황양이라는 말은 일제놈들이 주로 쓰던거고, 존왕양이가 맞음

사실 존왕양이가 맞으면 중국의 역사는 왕조 즉 왕의 역사로 내려야함 존황양이가 맞으면 일본의 천황은 천황이 아니라 천왕 즉 왕임.

근데 중국의 역사를 황제와 항후가 아닌 아닌 왕과 왕후 역사로 칭하는게 난 괜찮다고 봄 존황양이가 아닌 존왕양이라고 춘추에 나오니. 무조도 측천왕후라고 하니. 괜찮다고 봄

참 웃기고 웃기네 유적유 중적중이라





고려 성종과 최승로 좋아하는 사람들한테 묻고 싶음 역사

1. 장원제도(대토지제) 어떻게 봄?
2. 공신 후손 우대 (음서화) 어떻게 봄
3. 노비환천법 (향소부곡민 체제 강화) 어찌봄?

향소부곡민, 음서. 공음 보고 느끼는거 없음? 송나라 제도 본받은거 맞는거임? 과전, 무과, 부곡민 폐지 혹은 군현제로 고려 몇년뒤
바로 망한거 아심?

고려라는게 태생부터 내란터져서 1.2.3이 이미 쓸모가 없는 상황에서 진짜 저 3개는 뭐라고 보심? 아니 조선처럼 내란없이 왕조 교체한 나라가 저러는거야 뭐 그러려니 하지만 저건 진짜 뭐임? 아니 어떻게 된게 내란 속에서 나온 나라에서 어째서 저 3개가 더 공고히됨? 조선 태종은 반란 몇개 터지니깐 오히려
사병혁파, 무과 정비, 신문고, 좌주문생제 폐지 등등 줄줄이 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세종은 한글은 말할 것도 없는데 고려 성종기에도 없던 종학설치까지도 했는데 송나라는 내란한방 끝내고 더 개혁하고 더 열렸네 진짜 챙피스럽지도 않음? 그 장원이니 공신후손 우대니 하니깐 김치양이나 헌애왕후가 그걸로 해쳐먹잖아. 이딴게 성군이냐? 송시열도 저딴짓거리를 안해겠다.

아니 혜종 왕무는 불쌍하고 성종 왕치는 성군이고 광종은 미치광이냐?

드라마 정도전에서 왕씨몰살을 뺀것이 '세월호' 때문이란 주장을 반론한다. 그리고 드라마 정도전에 대한 평 방송/연예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각이고 작가가 설령 설마 그 말을 해도 여러 주장중 하나일뿐이다.
세월호고 아니고를 떠나서 이걸 올리지 않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세월호는 비극적인 사고이나 이걸 드라마 정도전에서 붙일 필요는 없다.

1. 드라마 정도전의 주인공은 정도전과 그가 모신 왕 조선태조에 대한 역사 논란

알다시피 이런 것을 일들을 올릴수록 역사논쟁이 가열차게 일어나는데, 올릴 필요도 없고, 실제로 실록이나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 등등에서도 크게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다. 이유는 피를 부르고 왕조를 뒤집었다고 욕을 먹을바엔 차라리 그것이 낫기 때문이 그렇다. 어차피 위화도회군때 참담한 모습들만봐도 포은 정몽주의 암살까지 이후 옥사만 봐도 더 이상은 무리이기 때문이다. 여말선초는 나말여초와 더불어 호란과 왜란 침략이 아닌 국내에 일어난 일중에서 가장 논란이 뜨겁고 어찌보면 우리의 가슴아픈 역사이기 때문에 싸움만 일어나기 때문에 접었다고 본다. 오히려 과거 용의 눈물에선 이걸 올렸던게 문제이다. 또 태조 왕건이 꿈에서 나타났다. 참 기가 찬다. 사실 무인정사도 방원의 난으로 묘사해버려 조선 태종이 갑자기 욕을 많이 먹었고 하륜도 너무 욕을 많이 먹었다. 원래 이것은 무인정사가 맞으며 정도전과 이방원 쌍방의 갈등이 빚은 참극이고 결국 한쪽은 역사의 비극을 또 한쪽은 역사의 오점을 남긴 예로 생각하면 될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것을 염두해서 올리지 않았다.

2. 폭력성 논란

이미 위화되회군에서 병사들끼리 싸워 피를 뿌리고 시체를 쌓을때 포은 선생이 죽을때는 폭력성 논란이 일어날법도 했다. 시청자들 입장에선 보기는 썩 좋지는 않을 것이다. 무인정사만 봐도 그렇다.

 3. 캐릭터의 붕괴 우려

삼봉 정도전 태조 이성계 그 두 주인공이 두 주인공만큼 그걸 올리다가 괜히 극의 흐름이나 캐릭터가 깨지기 때문이다. 괜히 이걸 올려 악역이 될바엔 차라리 왕씨몰살 부분을 생략했을지도 모른다. 

이 3개도 있기 때문에 왕씨몰살을 넣을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드라마에 대한 총평이다. 

일단 간만에 괜찮은 드라마가 나왔으며, 새로운 시각에서 적은 것은 물론 정도전 자체도 조선 고종기에 복권되어 19세에 뒤늦게 빛을 본 것이 삼봉 대감이다. 그 삼봉 대감이 드라마로 나온 것은 좋았다. 재상정치, 계민수전은 분명 그 시절에는 통하지 않을지도 모르나 실현불가능했기 때문에 난 "그냥 말만 저렇게 떠들지 한게 뭐야"라고 했다. 하지만 병자호란 이후 조선에서 필요하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도 해본다.

나름 고심해서 만든 드라마이자 신경써서 만든 드라마이기도 하다. 작가의 노고도 괜찮았고,
단지 한가지 아쉬운 것은 태종과 이방원이 재상정치와 관련해서 차라리 무신정권기를 이야기를 하는게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조선 태종때는 신문고, 무과의 정착, 좌주문생제 폐지, 속아문, 사병혁파 등등등 제도가 넘쳐나 무신정권의 가능성을 죄다 차단시켰다. 
반대로 삼봉의 경우는 재상정치, 계민수전, 미신을 없앤 것 등등등으로 세종이 나와도 이후 연산군같은 폭군을 막았을지도 모른다. 선조와 인조와 같은 왕의 실정도 재상이 되어 똑똑한 신하가 전권을 쥘수도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알고 보면 조선초기는 태종과 세종 문종같은 왕이 필요하다면 연산군같은 폭군이 나올때는 삼봉이 절실했던 것은 아닐까 싶을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들의 생각은 달랐고 이들은 정치인이었고 마침내 무인정사로 한명은 비극을 한명을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또 한명은 오점을 또 비극을 남길만큼 판단이 어렵고 어려웠다. 고려말 권문세가와 왕의 타락도 타락이지만 고려중기 인종기의 대혼란부터 무신정권의 흑역사가 이들을 이렇게 만든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든다. 특히나 무신정권의 폐단이 너무나도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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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통감의 문제점과 장점. 역사



문제점

[신(臣)등은 살펴보건대,]
“김부식은 김부(金傅)가 전씨(錢氏)에 비하여 공덕(功德)이 훨씬 낫다고 하였는데, 무엇을 보고서 그런 것입니까?
오월(吳越)은 송나라에 대하여 번신(藩臣)의 직무를 수행하며 받들어 군신(君臣)의 구분이 정하여져 있으나, 신라는 고려에 대하여 이와 같지 않았습니다. 대개 태봉(泰封)은 신라의 반적(叛賊)이요, 고려 태조는 태봉의 신하였으니, 비록 태봉이 무너지고 고려의 운수가 날로 번창한다고 하나, 신라는 고려에 대하여 일찍이 무릎을 굽혀 번신이라 일컬은 적이 없었는데, 하루아침에 종묘사직을 버리고 땅을 바치면서 북면(北面)하여 조회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전씨(錢氏)는 전류(錢鏐) 때부터 황소(黃巢)의 난을 기화로 비로소 오월에 웅거하면서 대를 이어오다가, 오계(五季)를 지나 송나라 태종(太宗) 때에 이르러서 13주(州)를 바치고, 그대로 머물러 숙위(宿衛)하였으니, 누대(累代)를 번신으로 지내다가 하루아침에 순리에 따라 토지를 바친 것이므로, 이는 제후(諸侯)가 몸을 굽히고 (자신을) 욕되게 한 것에 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김부(金傅)는 비록 역적 견훤이 왕위에 세워 주었기 때문에, 쇠미(衰微)하여 떨치지는 못하였으나, 신라는 세 성(姓)이 서로 왕위를 이어 거의 1천 년이 지났으니, 그 깊은 인애(仁愛)와 후한 은택으로 충분히 인심을 굳게 단결시킬 수도 있었을 텐데, 신하나 백성이 어찌 스스로 안정하고 스스로 정성을 바치기를 삼인(三仁, 미자(微子)·기자(箕子)·비간(比干))과 같이 하고, 선왕(先王)의 은택을 생각하여 잊지 않기를, 은(殷)나라의 백성과 같이한 자가 없었겠습니까? 더구나 왕자(王子)가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을 논하여 반복해서 간절히 간하였는데도, 어찌하여 경순왕은 효자가 간하는 것까지 뿌리치고, 1천 년 조종(祖宗)의 소중한 기물[重器]과 수천 리 영토를, 머리를 조아리며 두 손을 모아 공손하게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단 말입니까? 경순왕이 고려에 대하여 미약해서 힘을 쓸 수 없고, 위태하여 스스로 보존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선을 행하여 스스로 강해지면서 천시(天時)를 기다리는 것이 옳을 것이며, 만약 어쩔 수 없는 형편이라면, 살아 남은 무리를 규합하여 성(城)을 등지고 사직(社稷)을 위하여 한 번 죽기를 각오하는 것이 옳았을 터인데, 도리어 살펴 깨닫지 못하고 자신이 항복한 포로가 되어, 북면(北面)하고 신하라 칭하며, 고려의 궁궐 뜰에서 포복 진퇴(匍匐進退)하였으니, 그가 진(晉)나라 민제(愍帝)4)나 오(吳)나라 손호(孫皓)5)와, 다를 것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뒤에 비록 부귀를 누리고 권세가 대단했으며 외손이 번성했다고 한들, 어찌 능히 나라를 망하게 하고 자신을 잃은 큰 수치를 씻을 수 있겠습니까? 경순왕과 같은 사람은 큰 절의를 이미 잃었으니 나머지는 본받을 것도 없는데, 김부식이, ‘전(錢)씨와 대등하다’ 한 것은, 도대체 무엇을 보아서 그렇다는 것입니까?”


아울러 고려 태조의 평가이다.

“태조(太祖)는 뛰어난 무용(武勇)과 영웅적인 자질로서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들을 편안케 할 방략(方略)을 품었으므로, 하늘이 돕고 사람이 돌아와 드디어 대위(大位)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호걸들을 모아 결집하고 주변의 강토(疆土)를 개척해서 위덕(威德)이 널리 퍼지어 먼 곳에서까지 인심이 돌아오니, 역적 견훤(甄萱)이 무릎을 꿇고서 내조(來朝)하고, 김부(金傅, 경순왕)가 속수무책으로 국토를 바치게 되었습니다. 신라와 백제를 평정하여 삼한(三韓)을 통일하였으니, 그 공적이 얼마나 성대한 것이겠습니까? 비록 전쟁을 겪으며 나라를 새로 창업할 때라 아직 모든 제도를 정비할 겨를이 없었지만 그 규모야말로 원대한 것이었습니다
 
국역 동국통감에 나온 이야기인데. 당시에 경순왕의 후손들이 뻔히 있음에도 저런 앞뒤가 이상한 글을 썼는지 이해불가다
충암 김정 선생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있을 것이다.
다 하나같이 집안도 집안이나 머리도 좋은 양반들이었다. 당시 경순왕의 후손들과 이후 후세들이 저걸 다 볼텐데, 뒷감당은 어찌하려고 저런 글을 적는지 모르겠다.

특히 촉의 유선과 오나라의 손호랑 비교하는 것은 진짜 너무 막나갔다고 본다. 물론 고려 태조도 옛 고구려 그리고 옛 백제는 물론 신라까지 다 포함시키고 삼한을 통일했다. 근데 왜 이렇게 앞뒤가 다른 글을 썼을까? 마의태자의 그 충심은 좋다 허나 이미 신라는 800년대 망했다. 비록 신무왕과 장보고가 힘을 합쳐 나라를 다시 세웠으나 안타깝게 신무왕은 왕을 6개월만 했다. 그리고 장보고는 죽었다. 이미 그때부터 신라는 멸망했다.
 
이건 뒤집어 생각해보자. 이유는 고려말만 봐도 그렇다 파죽지세의 명나라가 뜨는 상황 속에서 고려의 왕들과 권문세가들은 명나라 사신 김의를 죽이고, 북원과 붙어먹고, 대토지를 점유하고, 한번 해먹은거 계속 해먹으려고 했다. 결국 백성들의 지지는 바닥이었다.이후 왜구들이 미친듯 쳐들어오고 농번기와 장마철에 군대를 일으켜 만주를 도모하려고 했다. 그것이 요동정벌이었다. 나라의 꼴아지는 더 말이 아니고 결국 일어난 것은 위화도회군으로 위화도회군 이후에도 우왕과 권문세가는 왕위에 물러나고 대토지를 내놓아고 관직에서 줄로 내려가야 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전부터 꿀빤게 있는지 계속해서 버티고 또 버티다가 마침내 혼군 우왕은 죽었고 권문세가는 신진사대부의 손에 처참히 쫓겨났다.

그리고 이쯤되면 고려도 조선에게 하루 빨리 줬어야 했음에도 이후 포은 선생은 무슨 생각으로 계속 고려를 유지하려고 했을까.
이것에 대한 조선 태종의 말이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 같이 얽혀서 백년까지 누리리라"

고려를 유지하고 싶으면 우왕과 권문세가들은 위화도회군 이후 그냥 토지고 뭐고 나발이고 내려놓고 스스로 물러나야 했다. 그렇게 위화되회군 이후 조선의 태조 즉 이성계 장군이 압도적으로 성을 칠 지경이면 우왕은 싸울 생각을 접어야 했는데도 싸웠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이 죽었다.

경순왕과 달리 고려의 마지막 왕 우왕은 이렇고 권문세가들도 이러했다. 이걸 뻔히 알고도 저런 사관을 쓴것은 잘못이다.
본인들도 고려 태조가 삼한을 통일했다고 한다. 위대하다고 한다. 근데 왜 쓸데없는 글을 적었는지 모르겠다.

사실 경주김씨의 세도정치도 이런 역사책의 악영향이 영향을 끼쳤으리라 본다.

툭까놓고 저렇게 사관을 불안정하게 쓰면 도움될건 없고, 그냥
"경순왕을 전씨에 비해 공덕이 더 낫다니 뭐니 할 것은 없다. 하지만 백성들의 지지를 잃고, 신하들까지도 동요하고, 삼한의 새로운 주인이 나타남에 있어 새로운 시대에 왕에게 줬으니 경순왕을 탓할것도 마의태자를 탓할 것도 없을 것이다. 고려의 마지막 왕인 신우(우왕이 맞지만 동국통감에선 신우라고 하니 신우라고 할께요.)는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서 내려오지 않았으니 그보단 나을 것이다. 신라의 왕이 고려에 투항을 하자 고려태조 이후 몇백년뒤 고려의 왕들은 선대왕이 왕위를 통채로 받았다고 고려 태조와는 매우 자만하여 자화자찬하며, 황제라고 자화자찬하며 황제라는 것이 뺏기자 또 그것에만 집착하느라 교만에 빠졌다. 정작 백성들의 원성을 숱하게 받아 백성들의 온갖 지탄을 받은 왕들은 책임지고 내려오는 왕들이 없었으며 특히 의종과 충혜왕과 신우는 그 정도가 심했기에 강제로 쫓겨나게 되었다. 경순왕 김부의 투항은 불가피하고도 부득이했던 것은 물론 백성의 지지를 받지 못했던 왕이다. 앞전에 진성여왕도 비록 무능하고 무능하나 그또한 책임지고 왕에 내려왔다. 후한서 효헌제기 이는 논(論)한다. 전(傳)에서 이르길 정(鼎, 왕업을 상징하는 세발 솥)이라는 기물은 비록 크기는 작으나 무거우므로 신(神)이 보배로이 여기어 함부로 빼앗아 옮길 수 없다 하였다. 위나라가 짊어지고 가버리게 되었으니 이는 또한 한나라의 천운이 다한 귀결이로다! 하늘이 한나라의 덕을 미워한 지 오래되었으니 산양공을 어찌 꾸짖겠는가! 라고 했으니 결국 경순왕의 운명도 그와 같을 것이다. 참으로 불행한 왕이라고 볼수 있다."

이런 것을 보면 고려의 의종, 충혜왕, 우왕 3대 암군과 이후 연산군도 선조,인조도 전란이 끝나자 그냥 내려올 상황에서 무슨 염치로 앉아있었는지 난 모를 지경이다. 백성들의 고통은 가중된 판국에 저러한 글을 적었기 때문에 너무나도 답이 없다. 이런 글은 심사숙고로 적었어야 했다. 고로 경순왕과 마의태자의 논쟁은 아무 의미가 없다.오히려 후세에 악영향을 끼쳤다.
참고로 나는 고려태조의 시각에서 바라보지 두 사람의 시각에선 보질 않는다. 물론 고려태조 본받지도 않고 폭군으로 떨어진 의종, 충혜왕, 우왕은 답이 없을 지경이다.


사실 경순왕과 마의태자의 논쟁은 저곳에서부터 시작되었으니 참 후세에도 저런걸 남기니 답이 없다.

장점

[신등은 살펴보건대,]
“사람을 잘 관찰하는 자는 그가 세운 공(功)의 성취와 실패를 관찰하지 않고, 그가 행하는 일의 옳고 그름과 마음쓰는 것의 사악하고 올바름을 관찰합니다. 마음이 진실로 올바르고 일이 진실로 옳다면 비록 공을 이룩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또한 취할 만하니, 김보당 같은 인물이 그런 예입니다. 그가 동남에서 군사를 일으켰을 때에 강개(慷慨)하고 발분(發憤)하여 반란을 일으킨 역적들을 토벌하고 군부(君父)를 구원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으니, 그의 마음씀을 올바르지 않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가 이경직·장순석·유인준의 여러 무리들과 함께 전왕을 받들어 대의(大義)를 일으켰으니, 명분과 의리가 바르고 순하였으며, 일 또한 옳은 데서 출발하였다고 말할 만한 자인데, 불행하게도 패배하여 자신이 죽는 데 이르렀으니, 참으로 애석하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그가 죽음에 임박하여 말한 한마디는 다시 문신들에게 화를 입히게 되어 산 자가 없게 만들었으니, 그 처음부터 끝까지 절개를 온전히 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큰 강령이 이미 올바랐으니, 어떻게 성취와 패배를 가지고 사람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김보당 같은 현명한 자가 오히려 열전(列傳)에 들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은 의종의 폐위될때 소위 계사의 난 즉 김보당의 난이다. 고려사에 열전에 들지 않은 것부터 이상하다. 무신정권 인간들의 하는 짓거리를 보고 의종기가 나을만큼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는 광해군의 예만 봐도 그렇다. 이후 인조가 할말없게 만드는 무능하고 한심한 짓으로 비난을 많이 당해도 광해군의 복위 운동은 저렇게 일어나야 정상이고 다시 광해군과 그 광해군 관련 왕족을 올려야 했다 뭐 광해군은 지금도 논란이나 인조는 그냥 논란이고 뭐고 할것이 할말이 없는 왕이었다.

이제 의종의 이야기를 해보자. 툭까놓고 공예태후와 그 일가도 내려왔어야 했다. 무인시대에서 공예태후를 보며 괜찮은 왕비라고 생각했는데, 실상을 보니 이게 어머니인지 의문이다. 제일 먼저 후사 문제에서 왕의 결정에 오히려 둘째를 밀어 의종에게 미움을 당하고 이후 어찌된 영문인지 공예태후와 그 일가는 다시 대접받아 의종을 밀기로 했다. 그 일가 중 한명인 임원후는 왕의 특혜를 받아 문신들에게 숱한 지탄을 받으니 정말이지 할말이 없을 지경이다. 그리고 무신정권이 터지자 공예태후와 그 일가는 의종과 같이 책임지고 물러날 생각은 죽어도 없었다. 이후에도 그들은 살기 급급해 의종을 폐위하는데 동참하고 명종을 올렸으나 또 명종과도 등돌리고 화해하길 반복하니 문신들과 무신같지도 않는 무신들과 더불어 매우 큰 책임이 있다. 실제로 공예태후가 있을때는 수습은 커녕 나라의 상황은 매우 엉망이었다. 이런 어머니가 있기 때문에 의종이 더 폭군이 되는 것이다. 고려조에서 최악의 왕비로 꼽자면 난 단연 대목황후, 헌애왕후, 공예태후 3대로 꼽고 대목황후도 노비안검법을 해서 부곡의 정리도 하려고 했을때 맹렬하게 반대할만큼 답이 없었다 물론 헌애왕후, 공예태후는 그냥 말할 것도 없이 최악의 왕비였다. 문정왕후, 명성황후가 그들의 영향을 받았는지 아니면 그들은 그들때로 또 노답인지 헌애왕후, 공예태후도 그들과 다를게 없다.

사실 무신정권의 책임에서 의종은 폭군이나 주변에 신하라는 자들과 태후까지 모두가 책임을 질만큼 답이 없었다. 설령 대령후가 그 자릴 앉아도 상황은 다를게 없다. 그리고 공예태후는 도참설이니 뭐니 해서 왕비가 되어 정상적으로 뽑힌 왕비가 아니였다. 이런 왕비의 아들들이 폭군이 되거나 암군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고로 김보당의 난은 김보당이 비록 잘못한 점이 있으나 이것만 봐도 이해가 되니 열전에 올려야 하는게 맞다.


장점

국역 동국통감은 많은 양반들이 수고에 수고를 거듭해 쓴 책이나 결국 잘못된 것을 많이 고쳤다. 특히 대광현의 투항 시기가 고려사에선 앞뒤가 맞지 않았는데 920년대인지 930년대인지 앞뒤가 맞지 않으나 920년대로 했다. 

"그러나 그의 귀화한 시기에 대하여는 기록마다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즉, 『고려사(高麗史)』 태조 세가에는 934년 7월로, 『고려사』 연표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는 925년, 『동국통감(東國通鑑)』에는 926년으로 되어 있다. 오늘날 태씨(太氏)는 대부분 그를 시조로 하고 있다." 라는 것을 동국통감은 확정했다.

○거란(契丹)이 발해[渤海]를 멸망시켰다. 거란주[契丹主]가 지난해 겨울부터 발해를 침략하여, 서쪽 변방의 여러 부(部)를 공격하고는, 드디어 진군(進軍)하여 부여성(扶餘城)을 포위하였다가 이때에 이르러 함락시켰다. 드디어 진군하여 홀한성(忽汗城)을 포위하니, 발해왕 대인찬(大諲譔)이 싸움에서 패배하여 항복할 것을 청하였다. 거란주가 병사들에게 대인찬과 그 족속(族屬)을 호위하여 성을 나가도록 명하고는, 발해를 고쳐 동단국(東丹國)이라 하고, 홀한성을 천복성(天福城)이라 하였으며, 태자(太子) 배(倍)를 책봉하여 인황왕(人皇王)이라 하여 그를 임금으로 삼았으며, 대인찬을 임황(臨潢)의 서쪽에 두고는, ‘오로고(烏魯古)’라는 이름을 내렸다. 이에 발해왕의 세자 대광현(大光顯)과 장군 신덕(申德), 예부경(禮部卿) 대화균(大和鈞), 균로사정(均老司政) 대원균(大元鈞), 공부경(工部卿) 대복모(大福謨), 좌우위 장군(左右衛將軍) 대심리(大審理), 소장(小將) 모두간(冒豆干), 검교개국남(檢校開國男) 박어(朴漁), 공부경(工部卿) 오흥(吳興) 등 남은 무리를 거느리고, 전후로 고려에 도망하여 온 자가 수만 호였는데, 왕이 그들을 매우 후하게 대우하였다. 대광현에게는 왕계(王繼)라는 성명을 내려 주고, 종적(宗籍)에 붙여서 선대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요좌(僚佐)들에게도 모두 벼슬을 주었다.


이것으로 발해는 고려왕조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동국통감을 통해 확정할수가 있었다. 아울러 고려 태자가 송의 왕족이라니 뭐니 헛소리도 그만둘 수 있었다.

또 하나의 장점

[신(臣)등은 살펴보건대,]
“이제현(李齊賢)이 거란[契丹]을 대우한 방도에 대해 논하기를, ‘왕가도(王可道)가 화친(和親)을 끊자고 건의한 것은, 황보유의(皇甫兪義)가 우호를 지속하여 백성을 안식(安息)시키자고 한 주장만 같지 못합니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충선왕의 물음에 대답한 것은 다만 낙타 만을 논하였고, 태조가 화친을 끊은 실수는 말하지 않았으니 어찌 된 것입니까? 전사(前史)에는 화친을 끊은 것으로써 태조의 성덕(盛德)의 일로 삼아 찬양하였는데, 신은 마음속으로 의심이 갑니다. 대체로 보아 이웃 나라와 사귀고 먼 곳의 사람을 회유(懷柔)하며, 국경을 공고히 하고 사명(使命)에 신중을 기함은 곧 만세토록 나라를 보호하는 훌륭한 계책입니다. 지금 고려 태조는 신라를 항복 받고 후백제를 멸하여 겨우 삼한(三韓)을 통일하게 되어서 흩어진 자가 다 모이지 못하고 부상자는 다 일어나지 못하였으며, 제도나 경영을 처음 시작하느라 겨를이 없으니, 정작 강성한 이웃 나라와 화합하여 장원한 생각을 가지고 뒤돌아볼 때입니다. 거란은 대대로 유(幽)·연(燕)·요(遼)·계(薊)의 땅을 점거하여 나라와 군사가 부강해 지자, 중원(中原)의 혼란을 엿보아서 모조리 빼앗아 전부 차지하려는 뜻을 가지고 한창 사나운 기세를 펼치는 발해(渤海)를 마치 마른 나무 꺾듯이 쉽게 차지하였으니, 그들이 새로 창립한 고려를 보고서 어떠한 것으로 알았겠습니까? 그러나 오히려 우리에게 먼저 교빙(交聘)을 맺으려고 하였으니, 노려보는 불측한 마음이 없는지 어찌 알았겠습니까? 그들이 보내 온 사신을 예로써 대우하고 정성으로써 접대함으로 인하여 동맹의 우호를 성실히 맺는 것이 어찌 나라를 보호하는 좋은 계책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태조의 생각이 이에 미치지 못하였으니,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거란이 발해에게 신의를 잃은 것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기에 발해를 위한 보복으로 그 사신을 거절하여 심하게는 바다의 섬으로 귀양보내고, 그 낙타를 물리쳐 심지어 굶겨 죽게까지 하였으니, 이는 다만 거절하는 데 그쳤을 뿐 아니라 거절하기를 원수와 같이한 것으로, 그들이 우리에게 원수로 갚을 것은 괴이할 만한 것이 못되었습니다. 이로부터 변경(邊境)에 흔단이 날로 깊어져서 정종(定宗) 때에는 광군사(光軍司)를 두어 변경의 방비로 삼았으니, 그 화는 이미 시작이 된 것이었습니다. 성종(成宗) 때에 이르러서는 소손녕(蕭遜寧)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침입하여 땅을 차지하려고 항복을 요구하므로 화친을 청하였으나 그 전화는 이미 요원(燎原)의 불길처럼 번져 갔습니다. 현종(顯宗) 때에 이르러서는 글안의 임금이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적(賊)을 토벌한다 말하면서, 실은 우리나라를 침략하여 빼앗으려는 목적으로 숙주(肅州)를 무너뜨리고 서경(西京)을 격파하여 승리의 여세를 타고 몰아쳐 들어오므로, 도성을 보존할 수가 없어서 임금의 수레를 남쪽으로 옮겼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았음이 실낱 같았으며, 그 화가 이미 하늘에 치달았습니다. 급기야 사신을 보내 강화(講和)하여 신하라 칭하고 정성을 바쳐 복종하게 되자, 변경(邊境)을 걱정하지 않고 백여 년을 지냈습니다. 고종(高宗) 때에 내려와서는 그 유종(遺種)인 금산(金山)·금시(金始)와 같은 자들이 잔당(殘黨)을 취합(聚合)하여 하삭(河朔)의 백성들을 협박해 몰고와 압록강을 건너서 산성과 진영을 함락시키어 환란이 몹시 심각하였으나, 군사를 부지런히 동원하여 두어 해가 지난 뒤에야 능히 소탕하여 화란(禍亂)을 비로소 종식시킬 수 있었습니다. 만약 거란이 금병(金兵)으로 인해 망해지지 않고 몽고(蒙古)로 인하여 섬멸되었다면, 고려의 존망 성패(存亡成敗)는 또한 예측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연유를 추구하여 보면 모두 고려 태조가 강성한 도둑을 대처하는 데에 그 방도를 잃고, 화친을 무시해 끊은 소치로 그런 것이니, 후손에게 물려 줄 계책의 실수를 이루 다 한탄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비판한 것을 잘했다. 일찍이 아편전쟁으로 조선왕조는 영국이 한참 사나운 기세로 청나라를 꺽을때 조선왕조가 이후 영국과 미국에게 방도를 잃고 무의미한 대항을 한것과 거의 비슷하니 이것은 굉장히 잘지적했다. 이후 고려태조와 호족들의 방도를 잃은 것은 서희의 담판외교로 논파가 되었다.

서희가 말하기를,

“신하가 임금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절을 하는 것이 예의이지만, 두 나라의 대신이 서로 만나 보는데 어찌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하며, 두세 번 오갔으나 소손녕이 허락하지 않자, 서희가 화를 내고 돌아와서는 관소(館所)에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소손녕은 그리하여 (서희가) 당(堂)에 올라와 예를 행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서희가 이에 영문(營門)에 도착하여 말에서 내려 들어가, 소손녕과 함께 뜰에서 (서로) 읍(揖)하고 당에 올라가 예를 행한 다음, 동서(東西)로 마주 대해 앉았다. 소손녕이 서희에게 말하기를,

“그대의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高句麗)의 땅은 우리의 소유인데, 그대의 나라가 (우리나라를) 조금씩 조금씩 개먹어 들어오고 있다. 또 우리와 국토를 연접해 있으면서 바다를 건너 송(宋)나라를 섬기니, 대국(大國, 거란을 말함)이 이 때문에 와서 토벌하는 것이다. 이제라도 땅을 떼어 바치고 조빙(朝聘)을 닦는다면 무사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서희가 말하기를,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곧 고구려를 계승한다. 그러한 까닭에 국호를 고려(高麗)라 하고 평양에 도읍한 것이다. 만약 땅의 경계를 논한다면, 상국(上國, 거란을 말함)의 동경(東京)도 모두 우리의 경계 안에 있는데, 어찌 그것을 침식해 들어간다고 할 수 있는가? 그 밖에 압록강의 안팎도 역시 우리의 경내(境內)인데, 지금 여진(女眞)이 그 사이에 부당하게 점거하여 완악하고 교활하게 변덕을 부리면서 길을 막아, 심지어는 바다를 건너서 가게 하였으니, 조빙을 통하지 못한 것은 여진 때문이다. 만약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다시 찾아 성보(城堡)를 쌓고 도로를 통하게 한다면, 감히 조빙을 닦지 않겠는가? 장군이 만일 신하의 말로써 황제에게 아뢴다면, 어찌 딱하게 여겨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하며, 말씨가 강개(慷慨)하니, 소손녕이 더 억지를 부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드디어 자세히 (그러한 내용을) 위에 아뢰었다. 거란의 황제가 말하기를,
“고려가 이미 화친을 청하였으니, 의당 군사를 철수하라.”
하였다. 소손녕이 위로연(慰勞宴)을 베풀려고 하니, 서희가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비록 실수한 일은 없지만, 상국(上國)의 군사들이 수고스럽게 멀리까지 오게 되었으므로, 상하(上下)가 쉴 틈도 없이 병기(兵器)를 가지고 한데서 여러 날을 지내고 있는데, 어찌 차마 연회를 즐길 수 있겠는가?”

하니, 소손녕이 말하기를,
“두 나라의 대신(大臣)이 서로 만났는데, 경하하는 예가 없어서야 되겠는가?”
하고 굳이 청하여, 그런 뒤에 (마지 못해) 연회를 허락하였다. 한껏 즐기고서야 연회가 끝났는데, (서희가) 돌아올 때는 소손녕이 낙타 10마리, 말 1백 필, 양(羊) 1천 두(頭), 무늬 놓은 옷감을 합쳐 5백 필을 주었다. 서희가 거란의 진영(陣營)에 머문 지 7일 만에 돌아오니, 왕이 크게 기뻐하여 강가에 나가서 맞이하였다. 곧 박양유(朴良柔)를 예폐사(禮弊使)로 삼아 보내어 (거란의 임금을) 알현케 하였는데, 서희가 다시 아뢰기를,

“신(臣)이 소손녕과 더불어 약속하기로는, 여진(女眞)을 소탕하여 평정하고 옛 땅을 수복(收復)한 뒤에야 조현(朝見)하는 길이 통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제 겨우 압록강 안 쪽으로만 수복하였으니, 청컨대 압록강 밖의 수복을 기다린 뒤에 조빙(朝聘)을 행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왕이 말하기를,
“오래도록 조빙을 행하지 않으면 후한이 있을까 두렵다.”
하고, 드디어 박양유를 보냈다.

[신(臣)등은 살펴보건대,]
“큰 기회를 포착하기란, 털끝만큼도 들어갈 틈이 없는 것이니, 오직 호걸(豪傑)스럽고 밝은 지혜가 있는 선비라야 사세(事勢)를 잘 살피고 헤아려서 기회를 잃지 않고 큰 공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위(魏)나라 무제(武帝)가 형주(荊州)로 쳐내려갈 때, 주유(周瑜)2)가 없었더라면 삼오(三吳, 중국 강동(江東) 일대를 칭함)의 땅은 이미 손권(孫權)의 차지가 되지 못했을 것이고, 부견(苻堅)이 진(晉)나라를 침략할 때, 사현(謝玄)3)이 아니었다면 양자강(楊子江) 동쪽의 땅은 또한 진나라의 소유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송(宋)나라 경덕(景德) 연간(年間)에 거란이 남쪽으로 침략하여 옴에 온 나라가 놀랐으며, 여러 신하들이 헌의(獻議)하여 혹은 금릉(金陵, 지금의 남경 부근)으로 행차하기를 청하고 혹은 성도(成都, 지금 사천성(四川省)의 수도)로 행차할 것을 청하였으나, 산처럼 홀로 우뚝서서 황제에게 친정(親征)을 권유한 것은 구준(寇準)4)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경력(慶曆) 연간에 거란이 재차 침략해왔을 때는 여러 신하들이 두려워서 감히 보빙(報聘, 이웃나라의 방문에 대한 답방)을 가지 못하였는데, 다만 하나의 수레로 오랑캐의 조정에 들어가 언변으로써 방패와 창을 대신하여 을렀다 눙쳤다 해서, 나라의 근심을 풀게 한 것은 부필(富弼)5)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만약 구준이나 부필이 없었다면, 남북(南北)이 둘로 갈라져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세상에서는 한갓 송나라의 구준과 부필이 있는 줄만 알았지, 고려에 이미 서희(徐熙)가 있었다는 것은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거란이 그들의 군사가 많은 것만 믿고 우리에게 싸움을 걸어서 나라를 집어삼키겠다는 마음으로 시끄럽게 구는 것을 멈추지 않다가, 바야흐로 소손녕이 침략해 들어와 봉산(蓬山)을 격파하고 선봉(先鋒)을 포획하여, 위세를 크게 떨치며 공갈(恐喝)로 항복하라고 위협했습니다. 성종(成宗)이 서도(西都)에 행차했다가 서울로 급히 돌아오니, 여러 신하들이 헌의하기를 혹은 항복하기를 구하고 혹은 땅을 떼어 주자고 하였습니다. 성종이 장차 땅을 떼어 주자는 의견을 따르려고 하였으니, 그 계책이 큰 실수인데도 여러 신하 중에 감히 논박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서희만이 유독 불가함을 강력히 진달(陳達)하며 거란과 한 번 싸우자고 하였으니, 곧 구준(寇準)의 친정(親征)하자는 계책이었습니다. 거란에 사신으로 가게 되어서는, 서로 대등한 예(禮)로써 굴하지 않으니, 강경한 오랑캐도 두려워서 굴복하여 마침내 화친을 강구하였습니다. 그가 사신의 일을 봉행함에 체통을 얻었으니, 또 어찌 부필(富弼)에게 밑돌겠습니까? 그 당시에 만약 서희의 계책이 없어서 한 번 기회를 잃었다면 절령(岊嶺) 이북을 다시 보존할 수 있었겠습니까?”

사실 애초부터 청나라는 여진족으로부터 시작되었지 한족으로 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다. 직접 아편 전쟁이 끝나저 영국에 가서 저러한 담판을 지었어야 한다.  그래서 청나라는 명나라를 침략하고 조선을 침략해 온갖 해악을 끼친 여진의 후예라고 했어야 했고 온갖 오랑캐들이 다 몰아낸 조선의 태조를 어느 왕자가 본받아 많은 준비와 준비를 하며 아편전쟁에 가담하고, 그리고 조선에 복귀해 아편전쟁이 시작될쯤에 그랬어야 했다. 실제로 태조 이성계도 본시 원나라가 강해서 원나라에 의탁했으나 원나라가 멸망하고 마침내 이후 숱한 군공을 세워 조선이 탄생했다. 더 아쉬운 것은 태조실록이 등한시 되었던 것이다. 

뭐 이건 논란이 될수 있으니 좀 더 이야기를 하자면

다시 만부교 사건과 저 서희의 담판외교로 넘어가면 만부교 사건은 엄청난 실패작이고 서희의 담판외교는 성공했다. 단지 강동 6주만 얻었을뿐 여진을 쫓아내는 것은 예종기에 잠시 이루어지다가 이전부터 치밀한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동북 9성을 되돌려줬다. 결국 서희의 바램대로 되질 못했다. 4군 6진과 비교해선 툭까놓고 4군 6진이 낫다. 이유는 짱깨가 장백산이라고 우겨대는 백두산을 탈환한게 세종과 최윤덕 장군의 노고가 있기 때문에 그러했고, 그러기 때문에 백두산은 제 아무리 못나도 이걸 했던 조선왕조를 씹어대고 또 씹어대는 북괴땅이 아니라 우리의 땅이기 때문이다.


어찌되었건 이 책이야말로 그 팔만대장경이나 그걸 보관했다는 뭐시기보단 더 낫다고 생각한다. 






 



 








팔만대장경인지 팔만대장경판 장경판전인지 유네스코 지정해달라는 정권이 있었죠 정치/사회

하나도 정통성없는 무신정권이 그나마 정치적 정통성을 회복하기 위해 만든 것이 팔만대장경에 팔만대장경판 장경판전인데 (무신정권은 이것도 숟가락)
"2007년에는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다른 대장경판들과 함께 유네스코의 세계 기록 유산에 등재되었다."
정작 무신정권이 바닥을 기는 무능함과 몽골군의 악랄함이 더해져 황룡사 9층 목탑 박살나고. 초조대장경이 없어지고 팔만대장경을 백날 천날 만날 만들어본들 이전의 인적피해는 그것보단 중허지도 않으며 훈민정음 앞에 팔만대장경이든 그걸 보호하는 것보단 우위일리없죠 (훈민정음은 김영삼 정부때 등재됩니다) 난중일기보다 우위일리없죠(이건 박근혜 정부때 등재됩니다)

사실상 저거나 저걸 보관하는걸 세계기록에 등재시킨것부터 나라망신갑이었죠. 차라리 일반 문화재로나 남기면 모를까.
당시 국민들 정신상태를 시험하는 것같았어요.
무신정권이 정신승리하는 유물로 그걸 보호하는 것들을 참여정부가 세계에 등재한다? 민주주의 정권 맞습니까?
팔만대장경판 장경판전에 그 팔만대장경 만들때는 오히려 대몽항쟁때 비참함과 무신정권의 병신짓거리가 생각나는데?
이전에는 저걸 등재안했죠. 이유는 무신정권과 몽골군하는 짓거리 때문에

사실 민주화 민주화 그러는데 무신정권때나 몽골군이 신나게 황룡사 9층 석탑이니 뭐니 박살낼때 뒤늦게 만든게 저것이었죠.
드라마 정도전에선 "몽고족에 맞써 몇십년동안 만들었고,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다"라고 말해본들 제가 좋아하지 않지만 삼봉은 멍하니 쳐다만보고 있었죠.

사실 예전 박근혜정부나 이런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욕먹어도 되지만 민주팔이 새끼들의 역사왜곡과 저런짓은 더 욕먹어야죠. 초록불님이나 여러 사람들은 안호상을 비판하나 그 군상은 옛날일이고 문제는 민주정권의 역사왜곡인데, 그냥 왜곡하는 인간들과 옳은체하며 왜곡하는 인간들중 후자가 훨씬 나쁘죠.

저짓에 대해서 사과를 쏟아내고 반성을 쏟아내게 해야죠. 하는거 보니 무신정권과 수준이 다를건 없죠. 창칼안든거 빼고
차라리 난중일기나 올리셨어야죠? 민주정권 시대에 역사관이 맞긴 한건가요?




한계레가 죽이든 살리던 딴놈이 아닌 지가 상관이래 정치/사회

이제 저것이 지들끼리의 권력투쟁인데
자업자득이거늘
어차피 한계레든 문재인이든 다 정치적 기반 남한테 구걸해서 자칭 개혁하는 놈들이거늘
내가 두번 세번 말하지 않았나 자기만의 기준도 없고 장기적 개획도 없고 그야말로 깝깝한 것은 전정권이랑 비슷하다고,
어차피 한중FTA 국회선진화법 도서정가제 앞에 하나가 되어 해쳐먹은 인간들이거늘

개혁이란 일앞에 부끄럽지도 않나봐. 대통령 죽이기하든 살리기하든 국민들을 위한 도구주제에
희노애락은 잘도 느끼나봐.
고려말 신진사대부들이 탄압받은거에 비하면 좃도 아닌 새끼들이 고려를 세우기위해 후삼국시대 죽을고비넘긴 6두품 양반들과 왕건에 비하면 좃도 아닌 새끼들이 부곡에서 신음하다가 나라 뒤집기 위해 신세력을 지지한 신라말 고려말 백성들에 비해선 좃도 아닌 새끼들.

80년대말 깨지면 자기들 물러날 생각안하고 통일이든 이후를 준비할 새시대 인물 뽑을 생각도 안하던 새끼들.

고중세사 미화나 조선왕조 폄하는 현 여당쪽이 크게 했죠. 정치/사회

알다시피 안호상의 경우는 현재 여당 지지하는 사람들도 그다지 모르고 알려지지 않았고 백날천날 십어봐야 소용없죠. 무엇보다 삼한, 고려왕조의 동성애나 여성이 왕되고 뭐 이런건 야당쪽에서 먼저 미화했습니다.

이유는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때 사극만 봐도 답이 나오죠.
대부분 삼한시대나 고려시대를 미화하고 조선왕조는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착취받는.것으로 나오죠 삼한시대나 고려시대는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뭐 이런거 크게 안나오죠. 외적으로부터 도탄에 빠지게 나오죠 이전에는 조선왕조를 다룬 역사는 좀 달랐죠. 드라마 개국만봐도요. 몇년전 정도전만 봐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망국의 역사나 역사는 승자의 것이니 패자도 미화보자고 해서 꺼낸게 견훤, 문정왕후, 윤원형, 원균, 서장금, 정난정, 염장, 박영규, 능환. 공예태후 뭐 이런 것들이죠.

아울러 중국의 동북공정의 경우는 80년대는 어차피 수교도 안하고 뭣도 안하고 해서 크게 알려질리는 없고 전두환이가 극찬했다는 환단고기는 그냥 참고용으로 보고 극찬한거죠.

정작 자신들이 중국과 좀 우호니 뭐니 하면서 중국이 역사왜곡하고 뭐 김대중은 "신라도 나당전쟁에 싸웠다"
이야기 꺼내자 "이런거 당서에 있긴하냐?"라고 하면서 김대중이 데꿀멍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 유무는 불투명하다만 사실일 경우는 심각하죠. 그리고 제국의 아침이나 무인시대 딴곳은 주몽 대조영까지 막 제작되고. 그리고 그 뭐지 신돈까지 심지어 동북아역사재단 뭐 이런 것도 만들었죠.

정작 이명박 정부때도 심각했고 박근혜 정부들어서 고중세사 미화나 조선왕조 폄하가 드라마 정도전을 통해 상당부분 정화되었죠.

현 여당 지지하는 쪽도 보면.

뭐 부원배가 권문세가보다 더 막장이다 이런 이야기 하는 애들도 여당쪽애들인데 둘다 다를건 없죠.

심지어 기철과 달리 최충헌도 신하를 칭했다면서 최층헌이 무슨 거란군을 막았다 이런 소리도 했죠. 정작 동국통감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오죠

“황제께서, 거란병이 그대 나라에 도망해 있은 지 지금 3년이나 되었는데도 능히 소멸(掃滅)하지 못한 까닭으로써 군사를 보내 토벌케 하였으니, 그대 나라에서는 오직 군량을 도와 흠궐(欠闕)함이 없도록 하십시오.”
하고, 인하여 청병(請兵)하였는데, 그 문사(文詞)가 매우 엄격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황제의 명령에, ‘적을 격파한 뒤 형제(兄弟)가 될 것을 맹약(盟約)하라.’ 하였습니다.”
하였으므로 이에 우리측에서 상서성(尙書省)의 첩서(牃書)로 회답하기를,
“대국(大國)에서 군사를 일으켜 우리나라의 환란(患亂)을 구원하니, 무릇 지휘한 바는 모두 부응(副應)하겠습니다.”

동국통감 고려 고종기. .

“두 나라가 형제(兄弟)가 되기로 맹약하기를 청하노니, "

동국통감 고려 고종기

"○몽고 사신 찰고야(札古也) 등 10인이 왔다.

○동진국(東眞國)에서 사신을 보내어 이첩(移牒)하기를,
“몽고의 성길사(成吉思)는 군사가 멀리 떨어진 지역에 오래 가 있어 그 소재(所在)를 알지 못하겠고, 와적흔(訛赤忻)은 탐욕스럽고 포학하며 어질지 못하여 이미 옛 우호(友好) 관계를 끊었습니다.”
하고, 또 이르기를,
“본국은 청주(淸州)에서, 귀국은 정주(定州)에서 각각 각장(榷場, 교역(交易)하는 장소)을 두어 종전대로 매매(買賣)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몽고 사신이 나라에서 노자로 주는 예물[國贐禮物]을 가지고 돌아갔다.

○왕이 직문하성(直門下省) 마희원(馬希援)에게 명하여 서경(西京)에까지 전송하게 하였는데, 사신이 압록강에 이르러 주포(紬布) 등의 물건은 버리고 달피(獺皮)만 가지고 갔다."

국역 동국통감 고려 고종기

갑자기 자기들이 미화하기 싫은 무신정권 특히 최충헌과 그 일가를 다시 미화하더군요. 기철때문에 거란군쳐발랐네 심지어는 고려내에서 개혁을 할수 있네 뭘 하지만 이건 말기가 아니라 무신정권 이후는 별 의미없는 소리죠. 고려말의 경우는 한쪽은 전란 한쪽은 내란이었으니깐요. 이미 말기고, 뜯을 기회가 생긴거죠. 주변국도 상황은 영좋지 않았죠. 심지어는 동국통감에서도 공민왕때 망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갑자기 자기네들은 부정했죠.

현 여당이 신으로 모시는 대통령 김대중도 그러했죠.

"우리는 미국보다 훨씬 긴 역사를 갖고 있으면서 위대한 지도자로 세종대왕, 이순신 정도만 말하고 있다.이제 박 대통령은 역사에서 존경받는 지도자라고 국민에게 알려져야 한다"라고

세종대왕 이순신 정도만 아는게 아니라 여러사람 알고 있는데 저딴 이야기 까낼필요도 없죠. 박정희 그 양반 이야기 깨낼 필요도 없죠.

그리고 노무현인지 뭔지도 그 원균미화가 담겨진 소설을 읽었다고 그러고 원균도 경향미디어에서 띄웠죠.

여당의 역사관은 한마디로 "역사는 승자의 것이니 패자의 것도 재조명해보자" "조선왕조 양반들이 승자에 따라 싸갈긴 것" 이것이었죠. 정작 백성들을 위해 한게 무엇이고 업적이 뭐냐니까 하면 "그들도 피해자고 역사는 승자에 따라 쓴거니" 이런 내용이었죠.

이것에 따라 우리나라 고대사 고려사가 미화가 된것이죠.
조선왕조가 한글을 만들었고 4군 6진을 개척하고 향소부곡민도 싸그리 정리하고 무과도 정착시키고 신문고도 만들고 이럴때
공음과 음서도 정리될때.

사실 문민정부 이후 민주정부까진 역사 속 찌질이들에게 뻥을 갈기면 많이 먹히거든요. 실컷해쳐먹다가 안되니까 몰락한 인간은 봐주고 승자가 숱하게 당한건 안보고.

결국 현 여당쪽의 역사왜곡부터 바로잡아야죠. 안호상 걔네들이 미화했다 이런 소리해본들 역사공부하는 애들이 그런 애들 누군지 몰라요.

오히려 김대중이를 더 알고 김대중이가 이런 말을 했죠.

"우리는 미국보다 훨씬 긴 역사를 갖고 있으면서 위대한 지도자로 세종대왕, 이순신 정도만 말하고 있다.이제 박 대통령은 역사에서 존경받는 지도자라고 국민에게 알려져야 한다"라고

이런 개소리를 했던 것을 미화하고 영웅화한다던가. 세종대왕 이순신 앞에서 박정희 붙이는것도 김대중이가 웃긴거죠.

이전 경향미디어가 원균을 미화했다던가. 사실 저는 80년대 말이전 야당지지해요. 단 80년대 말 이전 야당만요. 현 여당 말고 관제니 뭐니 하지만 어차피 3당합당 DJP연대하고, 후단협, 대연정 뭐 이딴거나 하고 시도하니 이것도 관제중에 상관제죠.

드라마 정도전에선 부곡에세 착취받은 양지라는 여자가 쓰잘데가 없이 돌탑을 쌓는데 삼봉대감을 좋아하진 않지만 그 사람이 돌탑을 허물어버렸죠. 이래야해요. 아무리 자신들이 좀 당한게 있고. 착취받아도 할짓거리가 따로 있듯 현 여당쪽 역사관부터 바꿔야죠. 그 김한구 문제때 이재명이 이덕일 옹호하는 발언보고도 "이건 쫌 그렇네" 이 발언 뿐였죠.그 이재명이 욕을 한바가지 먹여야 함에도

구 여당이야 어차피 고대고 중세를 미화해도 걔들 스탠스가 그렇다 쳐도 현 여당이 저런 식의 역사관을 가지는게 용납이 안되죠.
앞에서 실실쪼개고 뒤로 해쳐먹은게 많고 칼빵놓을 궁리나 하는 몇번을 밥처먹듯 배신한 후삼국시대 고려초 잉여 호족들도 아니고 그래놓고 신라를 뜯어고쳤네 뭐네 하지만 정작 경순왕을 올린것도 호족들이죠.






뭐 2번은 그냥 희망사항이었지 정치/사회

사실 2번이 힘들거라고 저도 예상을 했습니다.
1번이 될거라곤 예상을 했고
늘 말하지만 네거티브를 문재인은 하지 않았고
어벙한 것이 순진함으로 다가서기 때문에

한가지 걱정스러운건 앞으로 사극들이나 사람들의
역사관이 문제인데
통나무 무쌍질 했다고 미화하는
견훤을 비롯해서 원균이나 염장이 미화된것처럼
이번에 정권을 쥐게되면 또 어떤 병신이 미화될지 걱정이 큽니다
드라마 신문왕 같은걸 만드는데 갑자기 안승이 영웅화되거나
장녹수가 천사로 나온다던지 이이첨이 영웅화된다던지
이런 찌질이짓하다가 따당한 인간들이 다시 미화될까 두렵습니다

사람들이 명분없고 실리없고 정치적 기반없이 여당 샌님들이 쪼아대니 꼴보기 싫으니 그에 걸맞는 인물 뽑아준거지 뭔가 통일이나 통일 이후 우리나라 백년대계나 이런 장기적 안목과 계획에서 뽑아준건 아니라고 봅니다.
명분없고, 실리없고, 사상적 기반 없는 자가 나라가 혼란이 되니 난적이니 의자왕의 복수니 뭐 그럴싸한 구호로 지지해서 뭔가 뒤집는건 무신정권때나 뭐 견훤의 쑈때나 똑같더군요.
그냥 칼창없는 무신정권들이나 칼창없는 견훤이 그럴싸한 말로 뒤집은거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냥 저는 하루빨리 독일처럼 통일했으면 합니다. 저런 것들한테
지는 여당도 여당인데 정통성이라곤 쥐뿔도 없어서 남이 질문하면 역으로 질문하고
밥쳐먹으면 말바꾸기잘하는 야당인간들 보기싫어서요






조선왕조를 빠는 것은 좋지만 고려 성종과 최승로를 빨면 안되죠. 역사

알다시피 최승로는 조선왕조에서 본 기능을 회복한 관리등용 시스템인 과거제도 확립시켰는데 그것도 반대했죠.

." 옛 성현의 풍도가 있는 정직한 인간이라. 과거제에 대한 최승로의 이야기를 보자 “이로 인해 남북의 용인(庸人·어리석은 사람)이 다투듯이 몰려왔다. 지혜와 재능을 따지지 않고 특별한 대우를 했다. 그런 까닭에 ‘후생(後生)’은 앞을 다투며 관리가 되었으나, ‘구덕(舊德·태조 이래 중용된 공신과 관료층)’은 점차 쇠락하였다."

이것이 곧 최승로가 말한 과거제의 반대죠.
그리고 저 공신은 호족들이고 이 호족들은 노비환천법과 공신 우대의 틈을 타 세습을 하였죠.
(그렇다고 저는 헌애황후를 비롯한 황보가문은 빨고 싶지 않습니다. 출신을 떠나서 반은 공주집안에 반은 외척집안에 그야말로 비정상적인 집안으로 그 고모는 대목황후였죠.이 집안은 노비안검법을 반대했죠.)

그리고 성종의 이야기입니다.

"성종 재위 중 최대 위기는 993년(성종12) 거란의 고려 침입이다. 조정에선 서경 이북의 땅을 거란에 떼어주고 화해하자는 이른바 ‘할지론(割地論)’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서희(徐熙)는 “적과 만나 그들의 의도를 살핀 뒤 결정해도 늦지 않다”고 성종을 설득했다."

처음엔 겁먹어서 할지론을 그대로 듣더니 이후에야 서희의 말을 듣게 되었죠. 서희때문에 성종 시기를 높게 평가하는 것도 웃긴게 서희는 그 옛날 광종이 선발했던 인물입니다.

"서희(徐熙)는 어릴 때 자가 염윤(廉允)으로, 내의령(內議令) 서필(徐弼)의 아들이다. 성품이 엄정하고 조심스러웠다. 광종 11년(960), 나이 열여덟로 갑과에 급제1)한 후 차례를 뛰어넘어 광평원외랑(廣評員外郞)에 임명되었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내의시랑(內議侍郞)이 되었다. "

한마디로 말해서 고려 성종과 최승로의 시기를 고려 최전성기네 고려의 치세네 하는 것이 웃기죠.
차라리 노비안검법이 시행된 고려의 광종 시절을 빠는게 제일 좋죠. 정말로 조선이 민본을 생각하고 생각한 나라면요.
그리고 고려라는게 성종과 최승로를 위한 고려면 그건 고려가 아니죠.

노비안검법 하면서 본인들을 위해 출세길 열어 과거제를 준 왕에 대해선 좋게 평가할 것이 안된다고 하면서, 성종에겐 수성의 군주라. 노비환천법을 해서 이자겸,이인임, 무신정권에 인간들이 그걸 악용을 안했습니까? 인간이 인간으로 안보고 인간을 재산으로 쓰는걸 통과시킨 인간들이 고려 최고 성군인지 묻고 싶습니다.

뭐 그렇다고 후백제계를 기반으로 하는 혜종도 좋아하진 않습니다. 그냥 얘는 잉여니깐요.

저는 고려 성종과 최승로를 조선왕조가 빨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조선은 고려 성종시기와 최승로 시기랑 딴판이니깐요. 나라의 개혁도 안되고 민심도 별로인 시절이니깐요.

드라마 해신과 야당지에 띄운 염장의 본 실체 역사

장차 그를 치려고 하였으나 혹 이기지 못할까 염려하여 망설이며 결정짓지 못하였다. 무주(武州) 사람 염장(閻長)이 왕에게 고하기를,

무주(武州) 사람 염장(閻長)이 왕에게 고하기를,
“조정에서 다행이 신(臣)의 계책을 들어주신다면, 당장 한 명의 군사도 수고롭게 하지 않고 맨주먹만 가지고도 장보고를 베어서 바치겠습니다.”

이것에 대한 사관의 평

"왕은 어찌하여 이를 살피지 못하고 소인의 말만 듣고서, 그로 하여금 도적의 꾀를 행하고 그 간사한 계획을 이루도록 하였다는 것입니까?"

국역 동국통감

한마디로 소인배 중에 리얼 소인배가 염장인데
여기선 염장이 장보고의 친구라는 말따윈 없음 소인이라고 하고 심지어 소인배에 말에 휘둘린 왕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모 야당지가 말한 뻘소리

"그리고 장보고의 옛친구인 염장을 보내 그를 암살 한다"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02&aid=0001990157

염장은 옛친구도 아니고 장보고때는 민애왕때 부하가 되었다 손떼다가 다시 장보고한테 빌붙은 인간 중에 하나에 저기선 소인배로 매도한다. 한마디로 신라에 이름난 간신배다. 더욱이 왕이 이를 어찌하면 좋냐고 우유부단하게 이끌린 끝에 염장이 직접나선 것이다. 더욱이 왕이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있음에도 끝끝내 죽이겠다고 했다.

더욱이 장보고의 고향이 해도인이라고 하는데 이는 추정이고 출생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염장은 무주출신이라고 딱 말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드라마 해신과 저 야당지에선 염장은 오랜친구라니 심지어 드라마 해신에선 염장이 김양이 청해를 급습하고 헐자 닥돌하고 김양의 부대와 싸우다 죽는다.

제 아무리 영웅사관이 싫어도 금도를 넘었다고 본다. 앞으로도 이런 식의 역사왜곡은 없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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