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망언이전에 이런 기사를 보시길 바랍니다. 정치/사회

김복동, 길원옥 할머니 지진 성금 온라인서 갑론을박 벌어져

“살인범이 상 당하면 부조하나”


변화 없는 日에 반감이 내부로

“할머니들 앙갚음 바라는 것 아냐

시민들 스스로 인식전환해야”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겪은 할머니들이 일본 구마모토(熊本) 강진 피해자들을 돕겠다며 성금을 기부한 일을 두고 온ㆍ오프 공간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피해자 할머니들이 진정한 관용의 가치를 몸소 보여준 데 대한 칭송이 대부분이지만, 일각에선 ‘일본에 온건한 태도를 보일 거면 위안부 사과를 요구하지도 말라’는 식의 억지 비판도 나오는 상황이다.

21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에 따르면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90), 길원옥(87) 할머니는 일본 구마모토현 등을 휩쓴 강진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각각 100만원과 30만원을 기부했다. 김 할머니는 20일 수요집회에서 기부 의사를 밝히며 “강진 피해자들이 아파하고 있는데 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일본에 재일교포들도 많고 우리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힘써줬던 사람들도 여럿 있다”며 “그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고민하다 모금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 할머니는 특히 “우리는 일본 사람과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도 힘을 보태줬으면 좋겠다”라고 시민들의 모금 동참을 호소하기도 했다.

두 할머니는 정대협 측에 먼저 기부 의사를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정대협은 곧 관련 단체들과 일본 지진 피해자 지원 모금활동을 벌여 여기서 거둔 기부금과 할머니들이 전달한 130만원을 함께 일본에 전달할 계획이다. 앞서 위안부 할머니들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도 정대협과 함께 모금 활동을 펼쳐 1,500만원 상당의 성금과 구호 물품 등을 일본에 보냈다.

평생의 한(恨)을 넘어선 할머니들의 선의에 많은 이들은 찬사를 보냈다. 주부 김진영(52)씨는 “관용이 점차 사라져가는 시대에 선행을 베푼 할머니들의 모습에서 많은 것을 깨달았다”며 “이러한 마음이 한국과 일본 양국에 큰 울림을 주길 바란다”고 했다. 네티즌 김**도 “창과 칼로 다가온 일본에게 오히려 따뜻한 마음으로 다독이려는 모습은 이 시대를 살리는 아름다운 정신”이라고 평가했다. 지난해 12월 일방적인 위안부 협상 타결안을 내놓은 한일 양국 정부에 강하게 반발해왔던 피해자 할머니들이지만 일본 지원에 먼저 나서자고 촉구한 대목도 높이 평가되는 분위기다.

하지만 할머니들의 진심을 삐뚤어진 시선으로 바라보는 여론도 적잖다. 대학생 최모(24ㆍ여)씨는 “위안부 피해 당사자들이 기부금을 전달하면서 일본에 굽히는 모양새가 나지 않겠느냐”며 “일본이 도움을 받고도 고마워할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회사원 정모(27)씨도 “일본인이 지지해 뽑힌 사람들이 일본 정치인들이고, 이들이 할머니들을 매춘부 취급하는데 그런 일본 사람들을 돕자는 말은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온라인 상에서는 더욱 과격한 반응들이 오갔다. 네티즌 tyui****는 “할머니들을 짓밟은 사람들 중에는 일반인들이 있었고 그 후손들이 지진으로 고통 받은 것”이라며 “이들을 도운 할머니들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심지어 “강간범, 살인범이 상을 당했다 한들 부조하러 가는 것이 옳은 행동이냐”(후**)는 반응을 내놓은 네티즌도 있었다.

전문가들은 달라지지 않는 일본 정부의 역사 왜곡, 과거사 반성 부족 행태가 근본적인 문제라고 지적했다. 윤인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우리가 인도적 차원에서 지원을 한 뒤에도 독도, 과거사 문제에서 일본이 자세를 바꾸지 않으면서 일본 정치권을 향한 국민들의 반감이 할머니들의 기부도 비판적으로 보게 만들었다”며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도덕적으로 행동한 할머니들의 성금 전달 사실만으로도 일본 시민들에게 미칠 영향력이 대단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가해자인 일본 군인, 당시 일본 정부, 위안부 문제를 인정하지 않는 현재 일본 정부의 책임과 일본 시민이 가져야 하는 윤리적 차원의 책임이 다르다는 것을 할머니들은 알고 있다”며 “할머니들이 주장해 온 것들이 특정 개인에 대한 분노와 앙갚음이 아니라는 점을 잘 안다면 우리들 역시 인식 전환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저는 이 당시 지진이 터질때 일본은 국민정서상 지원이 그래서 에콰도르로 신경을 썼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제까지 망언이 이해가 될 정도였죠. 김구라씨가 이걸로 방송접고 봉사활동했는데 결과물은 이거였죠. 제가 김구라씨같으면 어쩔까 하는 생각도 가졌죠

지진난 저 지역은 결국 자민당 의원이 당선되고, 저짓이 얼마나 허망한가를 느꼈죠.

항상 우리는 북한도 저렇고 중공도 저렇게 상대합니다. 관용이라 따스함이라 그 관용과 따스함이 오히려 성금을 준 많은 사람들에게 민폐를 주죠.예를 들어 연평도 포격도발을 막다 살아남은 군인들이 북한에 홍수같은 사고터질때 성금을 줘도 시끄러워지죠. 하지만 그 사람들은 그런걸 잘안하려고죠. 예를 들어 불법어선 때려잡은 해경이 중국에 지진같은 사고터질때 성금보단 가장 먼저 죽다 살아남은걸 기억하기 때문에 잘안하려고 하죠. 또한 주다가 또 욕먹겠죠. 본인들은 지금 이런 짓을 하고 있는거죠.

친일파는 싫다며 저건 좋나봐요.허허

미국소와 한우와 노트7과 아이폰 정치/사회

"아따 너는 36개월 지난 미국소나 먹으면서 노트7 폭탄 외국보다 더 비싸게 주고 샀더냐~ㅋㅋㅋ"

"남이 갤럭시 사든 아이폰 사든 요타폰 사든 블랙베리 사든 화웨이 사든 뭔 상관이여? 나름 합리적인 이유로 사서 잘쓰면 장땡인거지."

"먹는 식재료랑 전자제품 완성품이 파급효과가 같나?"

미국소 이야기나와서 미국소 옹호에 이민 운운하더니 이젠 애플까면 노트7 운운한다. 노트7이 싫으면 지나 이민갈것이지

물론 애플에 대해 큰 감정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양심이 있으면 노트7드립치고 미국소 옹호하면 36개월 드립치면 그냥 차라리 둘다 별로라고 해라 합리나 파급효과 드립은 또 뭐냐? 참 저런게 폐족들 사고방식인게 웃기다. 아 미국소는 싫고 아이폰은 좋나봐.

근데 미국소도 아이폰처럼 이미지 메이킹을 해야 하는데 미국 농가가 애플보다 돈이 없는지 그럴 여럭은 없는거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전자제품은 화재까지도 부르는데 말이지.

얼마나 피해자 코스프레라던가 이미지 메이킹에 잘쳐넘어가는지 잘보여주는 대목 중 하나다.




정도전에 대한 이야기 역사

제가 정도전을 마치 간신배로 묘사하고 태종을 띄워서 몇분에게 욕좀 먹은게 있죠. 뭐 욕은 달게 받으나 정도전이 있어야 입헌군주제 한다는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웃기죠.

예를 들어 조선초 정도전의 창칼이자 무인이었던 류만수라는 양반이 있는데 이 사람의 조상이 류경이죠.
무오정변을 아실 것입니다. 정변을 일으켜 몇대에 걸진 최씨정권을 붕괴시키고 실권자가 류경이 된 사건입니다.

더욱이 노비출신 김준까지 가세했으니 남들이 보기엔 참으로 이상적인 정치로 보일겁니다. 그지같은 최씨정권도 무너지고 천대받은 천민조차 정치권에 권력을 잡고,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했던 무오정변을 재상정치와 비교하냐?"라고 하죠. 하지만 이것의 성공과 더불어 류경은 마침내 급진사대부의 효시가 될 사상을 가져온 안향을 발굴합니다. 뿐만 아니라 김방경 장군도 변호해서 살립니다 정도전보다 더 낫지 결코 못할게 없는 문신이죠.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 김준은 이걸 비웃기라도 한듯 이걸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립니다. 환경이 좋았는데 막장된 최충헌과 달리 김준은 열악한 환경에서 자라서 그 환경부터가 좋은 인성을 쌓기 글렀던거죠.

정도전의 재상정치라 자칫 잘못하다간 무오정변 하나 터질까 이런 걱정부터해야 합니다. 더욱이 류경의 후손은 류만수고요. 툭 까놓고 류만수대감부터 인성은 좀 아닙니다. 남은 이런 양반이면 모를까.

더욱이 정도전의 불씨잡변도 본시 류숙이 자신의 지공거이자 스승이었는데 이 사람을 죽인게 신돈이었습니다. 결국 신돈과 정도전을 묶어 찬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지도 느끼죠

솔직히 명분으론 누구보다 좋은 양반이나 실상이 반대일 경우가 정도전이죠. 진짜로 불씨잡변을 하고 싶으면 류숙에 대한 이야기는 아예 거론도 하지말고 넣지 말아야죠. 태생이 그 조선을 애먹이고 갉아먹던 향리출신의 대표라서 그런가요. 툭 까놓고 호족이나 향리 이딴 세력들이 주인노릇하는 자체가 웃기긴 웃기네요. 한반도가 무슨 짱깨도 아니고 호족이 진골귀족 몰아냈다고 자부하는거 못지 않게 향리가 권문세가 깼다고 자부하는 것만큼 웃긴게 없고 오히려 본인들의 향리근성 향리의 조상인 호족근성부터 죽여야할 판국에 그건 하지 않았습니다.
본시 병서나 유교만 읽어도 향리나 호족은 완전 인간 이하취급인데






계유정난에 대한 저의 이야기 역사

사실 뭐 전 애가 왕이 되는건 창왕 옹립만봐도 별로라서
피할 수 없고 계유정난 이런건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김종서 이 양반이 문무겸비형 문신이라서 죽은게 안타깝지만 (뭐 이 양반도 한간에 안평을 밀었다고 하니)

한편으론 조선 선조가 왜란이 끝나고 그 단종처럼 한방 썰려봐야 나쁘지 않다고 보는게. 고려말 홍건적 침입 막은거 자기도 극찬했으면 자기도 공민왕처럼 썰려야죠. 혹은 단종처럼 이유는 조선왕조차도 패한 왕조를 그리워하면 반정까지도 가고 죽을수도 있죠.신하는 모름지기 반역행위로 죽을 수 있죠.

결국 단종의 죽음에 연민이 저런 한심한 왕의 등장이죠.
(고려를 그리워한다라 조선왕조 왕인지 아니면 고려왕조 왕인지 구별이 안가네요. 그렇게 고려가 좋으면 자기가 고려왕 모셔서 왕 꽂아두던가

물론 나름 불쌍하고 변명거리 많겠죠. 하지만 역사에는 변명없고 한풀이 없고, 동정없습니다. )

왕이라는게 열에 하나를 못해도 여럿 죽인다고 욕먹는게 왕인데
우리나라는 열에 반을 못해도 동정이죠. 열에 아홉을 못할때 그때 왕이 폭군이 됩니다. 미연의 싹을 못자르니 이렇게 된거지요

계유정난만봐도 일단 애가 왕인데 열에 다섯을 할까말까입니다. 아직 애고 미성년을 왕으로 앉혀서 성공한 사례는 조선조에 극히 드뭅니다 세종께서도 20대의 나이로 왕을 시작했죠. 태조,정종,태종, 문종은 조선왕치곤 성년의 나이에 왕에 오른 왕들이죠. 이 중에서 태조는 성년치곤 나이가 꽤 많습니다.

어찌보면 계유정난은 미연의 싹을 자른 조치로 보여집니다. 이 분위기는 어찌보면 중종반정으로 이어졌지요.
물론 제 조상중에는 사육신중 한분이 계신데 제가 묻고 싶은게 있다면 그럼 창왕은 폐하면 안되나봐요.

4원수에 대한 이야기와 공민왕이 폭군인 이유에 대한 논평과 나의 논평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이 나를 대신하여 군사를 출동하였었는데, 안우(安祐) 등이 감히 제멋대로 죽였으니, 이는 나를 안중(眼中)에도 두지 않는 것이다. 적을 파한 공은 한때 혹시 있을 수 있는 것이겠지만, 임금을 무시한 죄는 만세(萬世)에 용납되지 못할 바이니, 이런 자들을 그냥 두고 죽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후세에 교훈을 남기겠는가? 그런 까닭으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장차 도원수 안우와 원수 김득배·이방실에 대하여 전형(典刑)을 분명하게 바로잡으려 하나, 오히려 지난날의 노고를 생각하여 죄를 그의 처자(妻子)에게까지 미치게 하지는 않겠다. 그 관하(管下)에 있던 대소 관리들은 모두 유사를 시켜서 공을 참작하여 서용(敍用)하도록 하라.” 하였다.

[신등은 살펴보건대,]
“고려 5백 년 동안에 강한 도둑 떼들이 침범하여 거의 편안했던 해가 없었지만, 마침 영웅 호걸과 문무(文武)를 겸비하고 용력과 지략이 있는 재목들이 좌우에서 힘껏 주선하여 능히 외부로부터 받은 모멸(侮蔑)을 막아 국가를 진안(鎭安)시켰던 자가 있었으니, 이를테면 서희(徐熙)가 거란(契丹)을 평정한 것과 강감찬(姜邯贊)이 거란을 제어한 것, 윤관(尹瓘)이 여진(女眞)을 축출한 것과 조충(趙冲)·김취려(金就礪)가 요얼(遼孼, 거란의 유종(遺種))을 안정시킨 것, 박서(朴犀)·김경손(金慶孫)이 몽고를 물리친 것과 김방경(金方慶)이 왜구(倭寇)를 정난(靖難)시킨 것이니, 그들의 공이 사직(社稷)을 보전한 데에 있어 당시 임금의 의중(倚重)했던 바가 되었습니다. 지금 홍건적(紅巾賊)의 변란이 있어 우리의 도성(都城)을 넘어뜨리어 함락시키고 우리의 궁궐을 불태워 없어지게 하였으며, 우리 백성을 도륙(屠戮)하였는데, 여러 원수(元帥)들이 본래의 상태로 회복시키고 깨끗하게 숙청하였던 공은 또 지난번의 장상(將相)보다 더 큰 것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애석하게도 싸움에 이겼다는 소식이 겨우 전달되었는데, 총병관(摠兵官) (정세운이) 역적 김용(金鏞)의 도모한 바가 되었으며, 세 원수가 서로 연달아 해침을 당하였으므로, 온 나라의 사람마다 모두 김용의 살점을 씹고자 하였지만 그렇게 하지를 못하였으니, 왕은 어찌하여 살피지 않고서 명목이 없는 죄를 공이 있는 사람에게 더하여 죽임으로써 공에다 보답한다는 말입니까?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는 제문을 지어 애도하기를, ‘태산(泰山)과 같은 공(功)으로 하여금 도리어 칼날의 피가 되게 하였다.’고 하였으니, 대개 일찍이 공민왕(恭愍王)의 처사에 대하여 몹시 한탄하지 않음이 없었다 합니다.”

[나의 논평]
일찍이 무경에 《군참》에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군중에 물자가 없으면 병사가 귀부하지 않고, 포상이 없으면 병사가 참전하지 않는다. 《군참》에 그 배경을 설명한 말이 나온다. 향기로운 미끼로 고기를 유인하면 고기는 반드시 바늘을 물게 되어 있다. 두터운 상을 내리면 반드시 용사가 나오게 마련이다. 현사가 진심으로 귀부하는 것은 두터운 예우 때문이고, 용사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는 것은 두터운 포상 때문이다. 두터운 예우로 현사의 귀부를 종용하고, 두터운 상으로 용사를 부추겨야 구하고자 하는 자들이 오게 된다. 처음에는 크게 예우하다가 나중에 이를 바꾸면 현사가 오래 머물지 않고, 처음에는 크게 포상하다가 나중에 이를 바꾸면 용사를 뜻하는 바대로 부릴 수 없다. 두텁게 예우하고 포상하는 자세를 시종 관철해야만 현사와 용사가 죽음을 무릅쓰고 그 힘을 다하게 된다." 포상이 없으면 병사가 참전하지 않는다라고 하는데 정세운을 죽인 자를 가장 먼저 파악한 것은 3원수 중 하나인 문충공 김득배로 그는 “지금 겨우 도적들을 평정하였는데, 어찌 자신들끼리 서로 베어 죽이는 것이 마땅하겠는가? 옛날 전양저(田穰苴)가 제맘대로 장고(莊賈)를 죽였으나1), 위청(衛靑)은 소건(蘇建)을 죽이지 않았으니2), 이는 고금의 밝은 귀감(龜鑑)으로서 삼가지 않을 수 없다. 만일 부득이하다면 궐하(闕下)에 잡아다 놓고 주상(主上)의 처분을 듣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라고 했으나 안우, 이방실 두 장수는 왕명을 받지 않으면 반역자로 몰리게 되었다. 김용이란 자는 사지를 짖어 죽여야 함이 옳고 공민왕 또한 인당을 죽음으로 몰게하고 또 다시 이런 일을 반복하니 폐위를 당해야 할것이나 현자라고 불리는 목은 이색이라는 자의 행동이 매우 어리석기 그지 없는데, 그는 국왕의 명에 거역하면 그 역시 반역자로 몰리게 될까봐 [삼원수를 처벌하는 교서](죄삼원수교서(罪三元帥敎書))를 지은 것이다. 본시 문충공 김득배는 이색의 선배이자 스승이나 다름없던 사람이었다. 못해도 지인일 것이다. 같은 동료이자 지인과의 갈등 혹은 같은 문신들간 반목은 인과 의는 물론 신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사덕을 쌓고 동료 간에 서로 비방하며 배척하는 짓을 벌이는 자가 이색이라고 실수를 하면 반성하고 문충공 김득배의 가문에 사죄를 하며 공민왕을 폐위시켜야 함이 옳음에도 그러하지 않았기에 사덕으론 제 아무리 훌륭해도 그는 벼슬아치로 공덕을 쌓아야할 인물이나 오로지 사덕만 챙겼던 자이다. 본시 고려는 좌주니 문생이니 지공거니 동지공거니 하며 그것이 폐단이 되어 이름과 이름을 나누어 각기 파를 갈라 정쟁을 일쌈으며 고려 인종때는 그야말로 문신들이 이름을 갈라 싸우니 어지럽기가 태산같았으니 이는 정지상과 김부식 윤언이와 임원후와 의종을 올리려는 문신들과 싸움이 그 예이다. 무경에선 붕당과 국란을 이야기하는데 "《군참》의  말에 인하면 관원들이 붕당을 만든 뒤 가까이 지내는 자들을 승진시키고, 간사하고 부정한 자를 불러들이거나 천거하고, 어질고 현명한 인재를 억눌러 꺾어버리고, 작록을 수여하면서 공덕(公德)을 버린 채 사덕(私德)을 쌓고, 동료 간에 서로 비방하며 배척한다. 이를 일컬어 난리가 나는 원천인 난원(亂源)이라 한다." 헌데도 좌주니 문생이니 지공거니 동지공거니 하며 동료 간에 서로 비방하며 배척한 것이 문신들끼리 이토록 심하니 이런 참극이 벌어진 것이다. 이색이 바로 그런 자로 무인들을 대접하고자 무과를 신설하는 등 문신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고 했고 문아의 아름다움이 있으나 위기가 터지자 사덕을 쌓기에 급급하였으니 사덕만 쌓았을 뿐이다. 이로 인해 고려말 자신을 비롯해 여러 문신들이 유배를 당하고 죽음을 당하니 이또한 그의 책임이 매우 크다. 헌데도 논어에선 "하루 3번 반성한다"라는 것을 본인이 누구보다 잘 암에도 반성은 커녕 "나는 왕이 시켜서 한일이고 몰랐다"라고 했으니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정세운을 비롯해 안우와 이방실에 비하면 매우 후안무치하기가 극에 달한다. 일찍이 안우와 이방실이 비록 현명하지 못하나 홍건적을 격퇴하는데 큰 공을 세워 과를 덮어줘야 하고,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정세운을 비록해 음모에 빠져 누굴 죽이고 또 그들은 불행이도 음모에 빠져 죽으니 큰 공으로 과를 더욱 덮어줘야 한다. 그 한산백 이색은 자신의 선배이자 지인이 전장에서 공을 세울때 대체 무엇을 한것인지 의문이 들며 하루 3번 반성하라는 말을 싹 잊으며 오히려 잘못을 늬우치긴 커녕 몰랐다고 한다. 이들 관계에 틈이 생기자 음모를 저지르는 자는 김용이며 또한 공민왕은 그 다음 일것이다. 그들의 책임이 너무나도 막심해 그들을 폐위시키거나 쫓아내야 함이 옳다. 이후 흥왕사의 난으로 김용은 죽었으며 공민왕은 이후 실정을 저질러 홍륜에게 죽게되었으니 이때 공민왕을 따르지 않고 벼슬아치들이 중론을 모아 그를 폐위시키고 김용을 죽여 일찍이 공양왕을 옹립하지 않았고 뒤늦게나마 공양왕을 옹립하나 결국 고려의 멸망이 임박했다. 아 공양왕은 이러한 전왕의 실정의 무게에 죽으니 실로 안타깝기 그지 없다. 더욱이 공민왕의 하는 행실이 형인 충혜왕과 비슷하며 그 아들 우왕과 비슷하며, 전왕인 의종과 비슷하니 어째서 이런 왕을 폐위시키지 못하였는지 의문이 들 정도이다. 공민왕은 또한 이전에 북벌을 감행한 인당을 죽인 책임자임에도 남에게 의심을 받음이 옳으나 되려 남을 의심하니. 자신을 숨겨 남을 의심하여 사람을 죽인 자는 간교함에 의심이 더해져 그 간교함에 극치를 보이니 이것은 흡사 김보당의 난에서 김보당을 헐뜯으며 복위를 위해 자신의 실정에 뒤늦게 자신을 후회하며 김보당의 난을 틈타 복위하려다 죽음을 당한 의종과 같은 것이다. 안정복은 3원수를 싸잡아 비난하나 정작 이 책임자는 단연 김용이고 더 나아가 공민왕일 것이다.


대충 상황 1. 홍건적 격퇴 신나게 했음. 2. 정작 김용이 보낸 거짓 밀서로 3원수를 빌려 정세운을 죽임 3. 이후 김용이 정세운을 죽인자는 3원수라며 또 죽임 4. 이후 들통나서 김용이 반란을 일으킴 5. 이내 진압됨 6. 공민왕은 반성은 커녕 교활한 짓거리는 숱하게 믿을 사람이 없다며 또 자기 속이고 남 의심하는 버릇 도짐 7. 김용도 개새끼 공민왕도 개새끼, 8. 이색은 살아남았으면 자신의 선배인 김득배는 물론 4원수한테 석고대죄를 하든 뭘 하던 해야하는데 몰랐다고 철면피깜 이짓뿐만 아니라 이후 창왕 문제로 또 욕 바가지 처먹음 9. 유배당해서 죽을번했는데 살아남음.

뭔 전쟁에서 공 세우면 또 죽고 죽고 또 죽고 죽고 이전에 김경손 죽은거 계속 반복함. 고려라는 나라의 핵심이 보훈 정책인데 보훈 정책이 이렇게 쓰레기에 엉망이니 무신들이 위화도회군에 참여해서 왕씨 일족들 죽이고 그러지. 이게 무슨 무를 숭상하는 나라야. 무과도 없다며? 공민왕도 그냥 뭐 충혜왕이랑 비슷해처먹어서 그냥 공양왕 좋아하고 싶네.

참 고려조를 무경의 시각에서 논파를 해도 이건 시발 그냥 생겨처먹을 나라가 아니네....
한글을 남겼나. 무인들 대접을 했나. 문신이 전쟁까지 나갈 정도로 공 크게 세워도 죽여, 뭐 한게 없네. 와닿는게 하나도 없어. 진짜 왕건 그 새끼가 해처먹으려고 고려 세웠나봐. 하긴 그 인간이 무슨 고구려랑 연관이 있어. 호족들이 무슨 고구려랑 연관이 있어. 다 골품제로 지들 밥처먹기 힘들어지니까 반란 일으켜서 나중에 까부수고 지들끼리 해처먹어서 생긴 나라지. 툭까놓고 고려는 발해 왕족들 몫이지 왕건 그 새끼 몫이겠냐.  오기 전까지는 원래 고려는 고려도 아니였지. 그냥 고려세우고 나중에 김훈,최줄의 난때 대씨일가가까지 끼어들어서 왕씨일가 죽이고 왕조 바꿨어야 했음.


 



















무슨 지금 정권보는데 호족 새끼들이 잡은거 같아요. 정치/사회

자기 집안이나 가문들은 항일투쟁도 안했는데 유달리 친일 어쩌구 하는거나 뭐 견훤도 백제랑 상관도 없는데 후백제 참칭하다가 지가 스스로 나라세웠는데 지가 몇십년간 해쳐먹고 스스로 문닫았으니 고려니 후고구려니 하면서 왕건이니 궁예니 마치 호족 새끼들 보는거 같네요. 고려통일도 이민족들이나 여러 호족들이랑 다르게 여진족하고도 싸운 유금필이 다 한게죠. 둘째는 쌍기나 광종이 다 한거고 근데 유금필은 고려쪽 호족들이 유배먹이고, 쌍기나 광종도 호족들이 죽이지못해 안달랐죠.

신라의 골품이나 녹읍이 문제많죠. 귀족들 문란한거 사실이고
근데 그 새끼들 골품깼다고 자화자찬하면서 정권잡으면서 혜종, 정종 시절 한거없고 둘다 골로 보내고 골품대신에 지들이 골품보다 더 갑이었죠. 광종시절에도 제도 닦은거 순전히 귀화인 쌍기가 다 했죠. 툭 까놓고 혜종, 정종 시절 6년이 60년이든 저 새끼들도 말이좋아 뭐 5년 6년이지 60년이죠. 당장에 로스쿨 이런 병신제도나 행시도 없애겠다고 하죠

그러고 보면 우리 한국사에서 호족들이 질타를 안받아요. 그러니까 지금 정권잡는 새끼들이 다 호족새끼들이랑 하는 짓이 비슷하니 뭐니 그런거죠. 야당도 그렇고. 특히나 지금 졍권잡는 애들은 백제도 아닌주제에 후백제 참칭하는 호족새끼들이랑 비슷하지요. 나주오씨쪽이야 힘이 약했으니 그렇다쳐도 서필같은 가문이야 호족이라고 해도 이후 기득권 내려놓아서 그렇다쳐 문제는 후백제에 있다가 후백제 뒷통수깐 박영규 뭐 이런 새끼들이 문제죠. 고려내부나 신라내부에 있던 6두품 출신들이나 호족들이 문제죠.

진짜 지금 정권보니 후삼국시대 호족나부랭이들이나 6두품 나부랭이들이나 광종이전 고려나 그때새끼들 의식이랑 비슷하네요. 미국이 고려초에 화친보낸 거란같은 애들이고 북괴가 고려초나
중기에도 위협되는 여진족같은 애들이고.(참고로 북괴의 화전양면전술은 여진족이랑 비슷) 왜구야 그때나 지금이나 상종이 안되고 짱깨야 이후 통일된 나라랑 비슷해쳐먹고.

문신 김보당의 평가에 대한 나의 평가, 그리고 여몽연합군에 관련 평 역사

문신 김보당의 평가에

[신등은 살펴보건대,]
“사람을 잘 관찰하는 자는 그가 세운 공(功)의 성취와 실패를 관찰하지 않고, 그가 행하는 일의 옳고 그름과 마음쓰는 것의 사악하고 올바름을 관찰합니다. 마음이 진실로 올바르고 일이 진실로 옳다면 비록 공을 이룩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또한 취할 만하니, 김보당 같은 인물이 그런 예입니다. 그가 동남에서 군사를 일으켰을 때에 강개(慷慨)하고 발분(發憤)하여 반란을 일으킨 역적들을 토벌하고 군부(君父)를 구원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으니, 그의 마음씀을 올바르지 않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가 이경직·장순석·유인준의 여러 무리들과 함께 전왕을 받들어 대의(大義)를 일으켰으니, 명분과 의리가 바르고 순하였으며, 일 또한 옳은 데서 출발하였다고 말할 만한 자인데, 불행하게도 패배하여 자신이 죽는 데 이르렀으니, 참으로 애석하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그가 죽음에 임박하여 말한 한마디는 다시 문신들에게 화를 입히게 되어 산 자가 없게 만들었으니, 그 처음부터 끝까지 절개를 온전히 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큰 강령이 이미 올바랐으니, 어떻게 성취와 패배를 가지고 사람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김보당 같은 현명한 자가 오히려 열전(列傳)에 들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나의 평]
죽음에 임박하여 말한 한마디는 문신들에게 화를 입히게 되어 산자가 없게 만들었으니 문신들은 본시 제도의 정비를 하며, 학문을 퍼트려 나라의 지혜를 쌓게하는 신하들이나 그들의 문제는 미사여구를 좋아하며 언변으로 먹고 문예와 시에만 몰두하며 시류에 따라 바꾼다는 비판이 있으니 김보당이 그런 자이다. 해릉양왕과 비슷한 의종을 죽이기는데 앞장서는 난신적자들의 편에서면서 뻔뻔스럽게 난신적자들을 비판하여 반란을 일으키니 후자의 문신일 것이다. 한서(漢書)의 〈조충국전(趙充國傳)〉에 나오는 이야기대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을 것이다. 그는 본시 서한의 무장으로 여러 전공을 세움으로 한을 평안케했다고 한다. 이런 자가 현명하면 삼척동자도 현명할 것이다.  

여몽연합군에 관련 평

○문하 시중 김방경(金方慶)과 대장군 인공수(印公秀)를 원나라에 보내어 표문(表文)으로써 아뢰기를,
“소방(小邦)이 근래 역적들을 소탕하는 일로 인하여 몽고 대군의 군량미를 해마다 백성들에게서 거두어 들였으며, 게다가 왜국[倭邦]을 정토(征討)하려고 전함(戰艦)을 수리 건조하는 일 때문에 장정(壯丁)들은 모조리 공사 부역에 나가고 노약자들만이 겨우 밭을 갈고 씨를 뿌렸는데, 시절이 일찍이는 가물고 늦게는 큰물이 져서 곡식을 제대로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나라의 비용마저 피폐한데, 더구나 싸움에 다치고 물에 빠져 죽어서 돌아오지 못한 자가 많으니, 비록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느 세월에 소생(蘇生)될는지 기약할 수 없습니다. 만약 다시 일본을 치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에 필요한 전함과 군량미를 실로 소방에서 능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삼가 간절한 정성을 굽어살피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나의 평]
무경에선 만천과해라는 말이 있고, 일찍이 공자께선 "큰 바다를 보지 않고서야 어찌 빠져죽는 근심을 알겠느냐? 큰 바다를 보지 않고서야 어찌 풍파에 시달리는 근심을 알겠느냐?"라고 했으니 비록 고려가 세워지고 이때까지 고려는 땅의 소중함은 잘 알아도 바다의 소중함은 이리도 몰랐다는게 한심하기가 그지 없다. 비록 여진족과 싸우기 위해 바다에서 싸움이 있었으나 그 규모는 크지 않았고, 오히려 몽고같이 바다도 모르던 오랑캐들 따위가 바다를 건널 전함을 건조하라 지시하니 이제서야 만들기 시작하나 백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으니 실로 기가막히기 그지없고 그리하여 저러한 참혹함을 나은 것이다. 이는 몇백년전 고려가 바다에 대해 준비를 할 배들을 만들어야 했으나 그러한 노력이 전대의 신라만도 못하며 본시 고려는 삼면이 바다이자 땅보다 더 큰 바다를 위해 배와 전함을 백성들의 편리를 위해 병사들의 계책에 다양화를 위해 만들어야 하나 그러하지 못했다. 비록 녹읍이 부활해 혜공왕 이후 엉망이 되었지만 신라의 수군과 배는 당나라조차도 인정을 하며 왜구들조차 두려워하였으나 신무왕과 장보고가 바다를 이용해 배를 만들고 수군을 만들어 해적들을 정리하고 난신적자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하나 고려조에는 그러한 기세가 꺽히기 시작해 이 지경이 되었던 것이다. 강화도에서 난신적자들은 나무를 심고 또 심어 많은 백성들이 도륙되었을때 신무왕과 장보고처럼 배를 만들어 저들을 정리하지도 못했다. 또한 거란보다는 신라와 해전을 펼친 신라조에 왜구와 해전을 펼친 여진을 적으로 대해야 하기에 바다를 위해 고려는 일찍이 전함을 절차에 따라 오랜기간을 준비해 만들어야 하나. 공자께서도 아는 바다의 소중함을 오래전부터 고려는 이리도 모르니 바다도 모르는 거란과 몽고와 전란으로 이토록 고통을 받는 것이다. 고려는 삼한이 바다에 적게는 몇백에서 많게는 몇천개의 섬이 있음에도 더욱이 몽골을 바다에 치거나 바다를 이용해 정벌하면 필시 그들의 진격로는 끊어지며 우리의 진격로는  더 확보될 것이나 그것에 쓰일 나무들을 사찰건립에 쓰기 급급하였고 별궁과 정자를 만드는데 급급하였으니 이토록 참담한 결과를 맞이한 것이다. 몽고가 전함을 건조하라 지시하고 이제서야 만들기 시작하나 또 백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고, 그 과정이 실로 기가막히나 오래전부터 백성들을 위해 이것을 준비하지 못한 고려에 크나큰 책임을 물어야 할것이다. 김방경이 기뻐하지 않은 것이 당연한 것이다.







고려 현종에 대한 평과 강감찬에 대한 평에 대한 나의 평 역사

○안서도(安西道)의 둔전(屯田) 1천 2백 40결(結)을 현화사(玄化寺)에 시주(施主)하자 양성(兩省)에서 재삼 논박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신등은 살펴보건대,]
“둔전은 군민(軍民)을 중히 여기는 소이(所以)인데, 현종은 양성(兩省)의 논의를 배척하고 둔전을 절에 바쳤으니, 이는 백성을 중히 여기는 것이 부처를 중히 여기는 것보다 못한 것입니다. 임금이 다스리는 나라가 백성을 사랑하는 도리를 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은 부처를 좋아하는 임금으로 불리워졌으나, 오히려 백성들이 전답을 절에 시주하는 것을 금하였는데, 지금 왕은 비단 금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바치기까지 하였으니, 문무왕에게 미치지 못함이 멀 것입니다.”

[사신(史臣) 최충(崔冲)이 말하기를,]
“전(傳)에 일컫기를 ‘하늘이 장차 흥(興)하게 하려고 하면 그 누가 능히 폐(廢)하리요?’ 하였다. 천추 태후(千秋太后)가 멋대로 황음(荒淫)하여 몰래 나라를 빼앗으려 도모하였는데, 목종(穆宗)이 백성들의 촉망(屬望)을 알고는 천추 태후의 악당(惡黨)을 배척하고, 멀리 사신을 빨리 보내어 신기(神器)를 받도록 하여 본지(本枝)를 굳게 하였으니, ‘하늘이 장차 흥하게 하려고 하면 누가 능히 폐하리요?’라고 한 말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 이모(姨母, 천추 태후)가 끼친 화(禍)로 말미암아 무신(武臣, 강조(康兆))이 반역을 꾸미고 강린(强隣, 거란)이 틈을 엿보아 침범하여, 대궐이 모두 불타고 승여(乘輿)가 도성을 떠나 피란하였으니, 고난과 불행의 극도에 달하였다. 반정(反正) 이후에 오랑캐와 우호를 맺어 무(武)를 쉬고 문(文)을 닦았으며, 부세(賦稅)를 박하게 하고 부역을 가볍게 하며, 준수한 인재를 등용하고 정사를 공평하게 수행하여 내외가 평안하고 농상(農桑)이 자주 풍년이 들었으니, 중흥(中興)의 임금이라 말할 수 있겠다.” 하였다.

[이제현(李齊賢)이 말하기를,]
“최충(崔冲)의 말은 세상에서 이른바 ‘천명(天命)’이라 하는 것이다. 월(越)나라 구천(勾踐)은 쓸개를 핥으며 (오부차(吳夫差)에게 회계산(會稽山)에서 패한) 치욕을 씻었으며, 소백(小白, 제 환공(齊桓公))은 (옛날 화를 피해) 거(莒) 땅으로 도망하였던 일을 잊어버리어 (사후(死後)에) 제(齊)나라에 환란을 남겼었다. 임금이 천명(天命)이 있을 것만 믿고서 욕심대로 하여 법도에 어긋난 짓을 한다면 비록 천명을 얻더라도 반드시 잃을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다스려질 때 어지러움을 생각하고 편안할 때에 위태로움을 생각하며, 끝을 조심하기를 처음처럼 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명령을 대양(對揚)하였으니, 현종같은 임금은 흠을 잡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였다.

[나의 평]
절이 곳곳에 널부러지고 또 널부러짐에도 백성들의 땅을 또 절에 바치며 땅을 주는 모습이 제 아무리 불자였던 문무왕도 그러지 않았으나 문무왕보다 미치지 못하다는 소리를 들으니 이 왕이 과연 중흥이라고 칭할 왕이라고 할지 의문이다.. 그 옛날 신라조의 왕과 비교가 되니 태조부터 시작해 현종조까지 현종이야말로 최고의 군주로 꼽으나 현종이 그 전조의 왕 문무왕보다 못하니 이후 나머지 왕들은 어느 수준인지 짐작이 갈 정도로 답이없을 지경이다. 중흥의 군주조차도 이 지경이니 이후 좋은 왕들은 얼마나 나올지 심히 의심이 될 정도이다. 나라의 지엄한 법이 제 아무리 있어본들 황룡사에 거대한 탑과 여러 사찰이 있으니 나라의 지엄한 법도가 너무나도 아까울 지경하다. 제 아무리 100개의 제도가 있으면 뭣하겠나? 유가가 있어본들 뭣하겠나? 그 유가의 제도를 1개라도 지키지못하면 그 100개에 있는 유가의 제도는 겉치레일뿐이고, 지키지도 못하며 잃는 것은 신의일 것이다. 또한 김훈 최질이 제 아무리 난신적자라고 해도 고려사 열전에선 그를 반역에 넣지 않은 것은 그들도 거란군을 격퇴한 공로가 크기 때문이다. 이는 고려 현종에게도 잘못을 묻기 위해 이러한 것이라 보여진다. 문아에만 빠지고 문신들을 위해 공을 세운 자들에게 그들의 계급을 상장군 이상으로 올려야 함에도 도리어 재산을 손대어 인헌공 강감찬과 같은 문신임에도 결단하여 싸우며 거란을 격퇴시킨 것과 달리 도망가기 급급한 여러 문신들을 챙기기 급급하니 "《군참》에 나오는 이야기로 군중에 물자가 없으면 병사가 귀부하지 않고, 포상이 없으면 병사가 참전하지 않는다." 라고 했으니 이는 병사를 비롯한 장수가 포상이 없음을 넘어 재산을 손대기에 참전을 안함을 넘어 화가 미치니 그때 고려가 끝나지 않은 것이 신기할 것이며 또한 무예에 능한 자들은 전국에 모아 다시 뽑아 무과를 신설함은 이미 당대 송나라는 물론 전왕조인 당나라도 그러했으나 당나라 초기보다 못하니 이들이 무덕과 무예로 무과에 급제하고 중앙의 벼슬에 올라 공을 세우고 포상을 하며 계급을 올려야함에도 그러지 못하였으니 뿌리만 있을뿐 줄기는 없을 뿐이다. 몇백년전 중원의 나라만도 못한 제도를 가지니 거란과 전쟁에서 이김이 괴이함을 넘을 정도이다. 최충은 어찌하여 충흥이라고 말하며 이제현은 이런 왕이 어찌하여 흠을 잡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지 심히 의심스럽다.

○시중(侍中)으로 치사한 강감찬(姜邯贊)이 졸하였다. 강감찬은 금주인(衿州人)으로 성품이 청검(淸儉)하여 산업(產業)을 경영하지 않았으며, 젊어서 학문을 좋아하고 기략(奇略)이 많았다. 체모가 왜소하고 누추한데다 의상(衣裳)이 남루하여 보통 사람에 지나지 못하였으나, 정색(正色)하고 조정에 서서 큰 일에 임하여 대책(大策)을 결정할 때에는 우뚝하여 나라의 주석(柱石)이 되었다. 나이 70에 궤장(几杖)을 하사하고 3일에 한 번 조회하게 하였는데, 드디어 사직하고 성남(城南)의 별장으로 돌아가 졸하니, 나이 84세였다. 뇌사(誄詞)를 내려 조문하고 부의(賻儀)를 매우 후하게 주었으며, 시호를 인헌(仁憲)이라 내리고, 백관(百官)에게 명하여 회장(會葬)하게 하였다. 현종의 묘정에 배향(配享)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
“대단하도다. 하늘이 백성을 사랑함이여! 국가에 장차 화패(禍敗)가 닥쳐올 때는 반드시 유명한 현인을 출생시켜서 대비하게 한다. 기유년(己酉年, 1009년 목종 12년)·경술년(庚戌年, 1010년 현종 원년)의 해를 당하여, 역신(逆臣)이 반란을 꾸미고 강한 적이 침노해 와서 내홍(內訌)·외란(外亂)으로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웠는데, 이때에 강공(姜公)이 있지 않았더라면 나라가 장차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공이 들어와서는 모의(謨議)에 참여하고 나가서는 정벌(征伐)을 관장하여, 화란을 평정하고 삼한(三韓)을 회복하여 종사(宗社)와 생민(生民)들이 영원히 의뢰하게 하였으니, 하늘이 출생시켜 이 사람들에게 닥칠 화를 대비시킨 것이 아니라면 그 누가 능히 이렇게 하겠는가? 아! 성대하도다. 세상에 전하기를, ‘한 사신(使臣)이 밤에 시흥군(始興郡)에 들어가 큰 별이 인가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는 관리를 보내 가서 보게 하였더니, 마침 그 집 부인이 아들을 낳았으므로, 사신이 마음속으로 이상하게 여겨 데리고 돌아와 기르니, 이가 바로 강감찬이다.’ 하였는데, 후에 송나라 사신이 강감찬을 보고는 모르는 사이에 내려와 절하면서 말하기를, ‘하늘에 문곡성(文曲星)이 오래 보이지 않더니, 이제 여기에 있었구려.’ 하였다. 이 이야기가 황당한 듯하나, 부열(傅說, 은 고종(殷高宗) 때 현상(賢相))은 기·미성(箕尾星)의 정기이고, (주 선왕(周宣王) 때 어진 제후) 신백(申伯)과 보후(甫侯)는 숭악(崧岳)이 신(神)을 내리어 태어났다고 하였는데, 유독 강감찬에게만 의심할 것이 무엇인가?” 하였다.

[나의 답변]
문신임에도 귀주에서의 대승이 심히 위대하고 위대하니 이 모든 것에 공로는 현종이 아닌 인헌공 강감찬에게 돌아가야 할것이다. 일찍이 서희공이 강동6주를 얻으며제일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란 손무자의 말대로 비단 물러나게 함은 물론 거란에게 강동 6주를 얻어내니 손무자가 말하는 최고의 신하가 나왔을때 이후 인헌공 강감찬이 뒤를 미리 20만을 준비하여 10만의 대군을 물리쳤는데 그 피해는 엄청나 살아돌아남은 자 소수라 했으니 으뜸의 문신일 것이다. 최승로니 김심언이니 이러한 자들은 입으로 충언을 하며 대체 장의공 서희와 인헌공 강감찬보다 잘난게 무엇이길래 이리도 극찬을 받는지 의심된다. 장희공 서희의 말에 의미심장한 것은 본시 고려는 발해를 위한다면 발해가 멸망할때 그틈을 노려 독립한 여진을 복속시켜야 함이 옳음에도 고려 태조는 금수의 나라를 여진으로 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신라조에 끊임없이 침략과 물리침을 반복하여 삼한을 흔들었던 왜구들을 금수로 삼아야 함에도 어찌된 영문인지 거란의 사신이 오랑캐라고 불리는 것과 달리 행패를 부리지 않으며 예의를 보이며 왔던 것은 필히 그때에도 강동 6주와 여진의 방도를 묻고자 온것이 거란의 1차 침입때 사나워진 기세로 겁박하던 소손녕이 방책을 세워 물러났으나 그 이전 고려태조의 방도가 장헌공 서희만도 못하니 이 전란은 있어야할 하등의 이유가 없으며 고려의 피해는 실로 어마해서 만들었으나 전해지지 않은 실록이 불타거나 궁궐이 붕괴하는등 이 책임은 고려태조부터 고려현종등 모든 왕들에게 물며 외척인 헌애왕후와 김치양등은 이 책임에서 말할 것 없이 사지를 토막내 죽여야 할것이다. 결국 뒷감당은 서희와 강감찬 두 사람이 하였으니 고려태조의 방책이 서희,강감찬에 따라가지 못하니 실로 한심스럽기 그지 없다. 왕이 신하를 넘기는 커녕 신하가 왕 중에 왕이 되고 왕이 신하만도 못하여 이런 지경에 빠지게 되었다. 또한 그들은 본시 무관으로 활약하여 그들에게 무예와 무경을 뽐낼 과거를 통해 무관으로 만들어야 함에도 그들은 문신이니 실로 안타깝기가 하늘을 찌를 뿐이며 이를 빌미로 무신들을 핍박하니 김훈, 최질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들이 있어서 고려가 있는 것은 고려는 단지 소수로부터 지켜내는 나라일 뿐인 것이며, 그들의 대단하고, 또한 그들 못지않게 하공진과 양규의 공로 높혀야 할것이다.

뭐 이거 고려 왕조 중에서 제대로 된 왕이 하나부터 없네 태조부터 시작해서 현종까지. 그나마 낫다는 광종도 저 지경이네, 휴...그냥 조선 세종이 좋은게 세종이 성군이라는 것은 둘째쳐도 뭐 전부 다 합쳐도 세종을 따라올까 말까할 지경이네. 이후 고려 문종이 나오긴 해도 문종도 쓰잘데기 없는 절간을 숱하게 만들었지. 뭐 고려왕들이 다 하나같이 저 지경이야. 통일의 의미가 없네. 하긴 통일도 순전히 적국에 딸바치고 적국이 자기한테 딸바치고 이러다가 하나 하나 통일한거지. 적이었던 호족들도 다 이런 식으로 정략결혼. 그냥 조선왕조가 나은게 아니라 고려왕조가 너무 쓰레기일정도로 조선왕조가 낫네. 무슨 이런 나라가 200~300년만 가도 토가 나오는데 무려 500년 가까이 해처먹네, 이 정도로 썩은 나라를 통일 체제에서 무려 500년 가까이 지속하는거보니 답이 없구만. 발해처럼 그냥 300년 가까이 해먹고 끝내야지. 이성계 장군같은 사람이 1명만 나오는게 아니라 5명은 나와야 할듯.


  
 







김훈 최질의 난에 대한 평가와 나의 평. 역사

○상장군(上將軍) 김훈(金訓)·최질(崔質) 등이 여러 위(衛)의 군사를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중추원사(中樞院使) 장연우(張延祐)와 일직(日直) 황보유의(皇甫兪義)를 귀양보냈다. 경술년(庚戌年, 1010년 현종 원년) 전쟁 이래로 병력수를 더 늘리니, 이로 말미암아 백관의 녹봉이 부족하였다. 황보유의 등이 건의하여 경군(京軍)의 영업전(永業田)을 빼앗아 백관의 녹봉에 충당시키니, 무관(武官)들은 자못 공평치 못하다는 생각을 가졌다. 최질은 또 변방의 공훈으로서 누차 무관에는 임명되었으나 문관(文官)으로는 될 기회가 없어서 항상 마음에 불평을 품었다. 이 때에 이르러 김훈과 최질 및 박성(朴成)·이협(李恊)·이상(李翔)·이섬(李暹)·석방현(石邦賢)·최가정(崔可貞)·공문(恭文)·임맹(林猛) 등이 영업전을 빼앗긴 것을 가지고 여러 사람들의 분노를 격동시키고 여러 위(衛)의 군사들을 꾀어서 북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대궐 안에 난입하여, 장연우와 황보유의를 결박하고 매를 때려 거의 죽게 하고는, 합문(閤門) 안으로 들어가서 임금에게 직접 호소하기를,
“황보유의 등이 우리의 전지를 빼앗아 차지한 것은 실제 자신들의 이익을 꾀한 것이지 특별히 공가(公家)의 이익을 위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발꿈치를 잘라서 신발에 맞춘다면 사체(四體)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모든 군인들이 흉흉(洶洶)하여 이루 말할 수 없이 분하고 원망스럽게 생각합니다. 청컨대 나라의 좀[蠹]을 제거하여 모든 사람들의 심정을 쾌하게 하소서.”
하니, 왕이 여러 사람의 뜻에 어긋났음을 중시하여, 그들의 청에 따라 장연우와 황보유의를 제명(除名)시켜 유배(流配)하였다.

○을유일(乙酉日)에 어사대(御史臺)를 폐지하고 금오대(金吾臺)를 설치하였으며, 삼사(三司)를 폐지하고 도정서(都正署)를 설치하였으며, 무관(武官)으로 상참관(常參官) 이상은 모두 문관(文官)을 겸하게 하였는데, (이는 모두) 김훈(金訓) 등의 청원에 따른 것이다.

[신(臣)등은 살펴보건대,]
“나라가 나라답게 되는 것은 형정(刑政)이 있고 기강(紀綱)이 있기 때문입니다. 형정이 없으면 능히 착한 사람을 상주고 악한 사람을 벌줄 수가 없게 되어 악한 짓을 하는 자가 많아질 것이며, 기강이 없게 되면 능히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아래 사람들을 부릴 수 없게 되어 신분에 어긋나는 짓을 하는 자가 많아지는 것입니다. 현종(顯宗)은 강조(康兆)가 자기를 왕으로 맞이하여 세워준 계책을 덕으로 여겨 그에게 반역의 죄를 가하지 않았다가, 마침내 강구(强寇)의 변(變)을 자초하여 수레를 타고 파천(播遷)까지 하는 치욕을 당하였으니, 역시 스스로 반성했어야 옳았습니다. 그리고 남쪽으로 순행하게 되어서는 여러 불량한 무리들이 누차 행궁(行宮)을 침범하였으나 모두 방치한 상태로 문책하지도 않고 고식(姑息)적인 은혜를 보였으니, 악한 짓을 하는 자가 어떻게 징계되고 다스려질 수 있겠습니까? 김훈(金訓)·최질(崔質)은 모두 항오(行伍)의 가운데에서 기용(起用)되어 외람되게 여러 장수의 반열에 끼었으나, 문관(文官)이 되지 못한 것을 가지고 억울한 마음을 깊이 품고 괴이한 말을 만들어 여러 사람의 분노를 격동시켰으며, 군사를 일으켜 대궐로 향하여 가서 지존하신 임금을 경동(驚動)시키고 대신(大臣)들을 마구 때렸으니, 음흉(陰兇)함이 극을 다하여 난역(亂逆)이 이미 나타난 것입니다. 임금이 마땅히 대중이 보는 앞에서 (그들을) 죽여 온 나라에 사죄케 해야 옳았을 것인데, 도리어 포학한 기세에 위협 당하여 침묵만을 지키며 손을 모아잡고 앉아서 난리를 평정하여 질서를 회복시키지 못하였으니, 충신(忠臣)과 의사(義士)는 분심(憤心)을 품고 몹시 애석하게 여겼으나, 또한 한둘의 장상(將相)이나 재신(宰臣)들이라도 대의(大義)를 부르짖고 난역(亂逆)을 토벌하여 왕을 호위하는 자가 없었고, 반역자가 태연히 방자하게 굴어도 누가 감히 나무라지 못하였으니, 나라의 형정(刑政)이 있다 하겠으며 나라의 기강이 있다 하겠습니까? 왕이 나약하여 결단성이 없음이 이미 이와 같고 무신(武臣)의 교만하게 날뜀이 또 이와 같아서 위에서는 능멸 당하고 아래에서는 침체되어 다시 떨치어 일어나지 못하였으니, 어사대(御史臺)를 없애고 금오대(金吾臺)를 세웠으며, 삼사(三司)를 폐지하고 도정서(都正暑)를 설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노병(老兵)·추졸(麤卒)들이 모두 문관직을 겸임하여 요직에 포진하고 있어서 기세를 부리니, 종기가 이미 심장에 응결(凝結)되어 거의 약으로는 치료할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후일 서경(西京)에 행행(行幸)할 때, 이자림(李子琳)·김맹(金猛)이 기이한 계책을 바치어 김훈(金訓)의 역당들이 모두 도륙(屠戮)된 것은 다만 한 때의 요행으로 나왔을 뿐이니, 임금이 하늘을 받들어 죄인을 토벌하고 난신(亂臣)을 주벌하여 폭력을 금하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아! 사람들은 한갓 무관들이 문신을 죽이고 스스로 그 관직을 가진 일이 의종조(毅宗朝)에 있었던 것만을 알 뿐이고, 이날 관부(官府)를 바꾸어 놓을 때 이미 화가 터전을 잡게 된 것은 알지 못하였으니, 어찌 현종(顯宗)을 위하여 애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와전된 말로 북산(北山)의 여러 절 중[僧]이 군사를 동원하여 온다 하니, 경성(京城)에서 크게 놀라 경계를 엄중히 하였다

[나의 평]
고려 광종은 과거를 통해 훌륭한 신하들을 배출해 마침내 장헌공 서희와 인헌공 강참찬을 뽑으며 고려의 뿌리를 지켰으나 노비에서 안검된 자들은 본시 경서와 서경 등에 능하지 못한 자들이 여럿이었다.. 더욱이 그들은 본시 노비이나 창칼을 다루는 자들이 꽤 쓸만한 양인들이 많았으니 무예에 능숙한 자들을 과거로 뽑고 경서와 서경보다 더 익히기 쉬운 중국의 병서인 무경을 익히도록 하여 무덕을 쌓은 자들을 늘려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광종은 괴이하게도 이것을 하지 않았으니 노비가 된 자 양인이 되어도 제 아무리 병졸이 된다손치더라도 공을 세워본들 출세의 길은 보장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제 아무리 뿌리를 지켜본들 줄기는 이토록 썩었고 참담하니 비록 김훈과 최질이 난신적자이나 반역 열전에 그들의 이름이 오르지 않은 것은 필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수나라는 무예에 능한 자들을 동네아무개나 뽑고 골라 고구려를 침략했으나 처참한 실패를 맞보고 망하였으며 당나라 태종도 치세를 쌓음에도 이후에 그러한 것을 하지 않았기에 또 다시 처참한 실패를 겪어 후세에 웃음거리를 자랑했다. 이후 당나라 무후가 부끄러운 덕이 많으나 뜯어고치며 전 지역에 무예에 능한 자들을 뽑아 그중에 훌륭한 자들을 뽑아 이러한 일들을 막으며 당 현종의 치세또한 이러한 것이 있었던 것이기에 가능했다. 비록 저 중원을 장악한 당나라는 땅이 넓어 안사의 난이라는 치욕을 당하였고 혼란을 겪으나 망하지는 않았고 송나라 태조가 다시 세워 중원은 이어나가고 이후 무에 관해 다시 정리하여 전조와 달리 제대로 된 무신들을 만들 수 있었다. 이럼에도 고려의 왕들이나 문신들 중 최승로, 김심언이니 하는 자들은 이러한 것을 뜯기는 커녕 하는 것도 없이 겉으로만 보이는 문에 치중하여 요행에 따라 그저 피할 수 있는 시무니 무엇이니 쓰니 이러한 일들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무가 문란해주고 대접받을 자들 못받고 대접받지 않을 자들 대접받고, 상벌의 구별이 없어지니 하공진과 양규같은 무신들을 제외하곤 저런 자들이 나온 것이다. 김훈과 최질의 잘못을 따지기 전에 문신들이 병을 통솔하고 무신들은 저렇게 공을 세워도 상장군만 오를 수 있는 참담하기 그지 없는 병체제를 뜯어고치고 문아에만 치중한 과거에 무를 넣어야 하고 군 행정도 병마와 수군등의 절도사를 만들어야 하나 이또한 없어졌으니 참으로 참담하기가 그지없다. 저 반란으로 인해서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반성하고 잘못을 해야한다 당조(조선조)의 문신들도 이것에 문제를 그 누구도 삼지 않아 추가로 적는 것이다.


고려시대 군인들에 대한 대우가 참 썩고 썩었네요. 지금도 마찬가지로 북괴에 도발에 대응한 장수는 1대 정부부터 지금까지 공을 주기보단 해임을 시켰죠. 그냥 저 고려왕조가 하나부터 열까지 500년과 600년 700년까지 똥이라는 똥은 다 싸는군요. 말이 좋아 고려왕조지 뭐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정권이네요.

이런 왕조는 수나라처럼 한번 역사를 병신으로 만들어놓아야 정신을 차릴 것인데, 조선왕조도 본시 그러려고 했으나 다른 문신들이 가문빨 내세워 욕먹기 싫으니 세가로 만족했지요. 뭐 고려가 병신이니 결국 조선이 병신이 된거군요. 아 왕고 새끼들 진짜 싫다. 다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안드네...한글도 없어 토지제도도 더 썩었어 더 문치주의에 진짜 누구 말대로 없는게 낫네.









 


고려 성종에 대한 평에 평. 역사

[이제현()이 찬()하기를,]
“성종()은 종묘()를 세우고 사직()을 정하였으며, 태학()에 학비를 넉넉히 주어 선비를 양성하고, 복시()를 시행하여 인재를 선발하였으며, 수령()을 독려()하여 그 백성들을 구휼()하고, 속을 아름답게 하였다. 매양 수찰(, 친필 교서)을 내릴 때마다 글뜻이 간곡하여 풍속을 개혁하는 것으로써 임무를 삼았다. 거란이 우리나라를 집어삼킬 생각으로 장수를 보내어 침략하였을 때, 즉시 서도(西)에 행차하여 안북부()에 군사를 내보냈던 것은, 곧 구준()이 전연()에서 취한 계책이었다. 그가 관방()을 절령()으로 옮기고 쌓아두었던 곡식을 대동강()에 버리려고 하였던 것은 당시 용렬한 신하의 의논일 뿐이고, 필시 성종()의 본 뜻만은 아닐 것이다. 지난날에 만약 최승로()의 글을 보고 기뻐하여 그를 추구()하여서 헛된 과장을 버리고 독실한 것에 힘쓰며, 옛 도()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백성들의 생각을 혁신하는 정책을 추구하고, 이를 실천하는 데 게으름이 없는 동시에 빨리하려는 마음까지도 경계하며, 몸소 행하고 마음으로 터득하여 자신을 미루어서 남에게 미치게 하였더라면, 제()나라가 변하여 노()나라에 이르고, 노나라가 변하여 도()에 이르는 (것과 같이 나라의 풍속이 일신됨을) 바랄 수 있었을 것이다. 소손녕()이 자신들의 능력을 과신하고 (성종이) 백성들의 일을 돌보지 않는다고 무함하여 명분 없는 군사를 일으켰으며, 이지백()은 어찌하여 나라의 풍속을 개혁하지 않아야 적()을 물리치는 계책이 된다고 끌어댈 수 있었을까? 그러나 그가 아직 늙지도 않아서 후계자를 세운 것은 국가를 위한 생각이 큰 것이었으며, 죽음에 임해서도 함부로 대사()하는 것을 아꼈으니, 죽고 사는 이치를 통달하였던 것이다. 이른바 (일찍이 최승로가 보기에 임금이) ‘뜻을 가지고 있어서, 그와 더불어 정치를 잘 할 수 있다’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 훌륭하다.” 하였다.


[신()등은 살펴보건대,]
“본사()에 성종()의 후()를 이른바 유씨()라고 일컬은 것은 곧 광종()의 딸입니다. 무릇 사람이 배필을 만남은 생민()의 시작이요 만복()의 근원이라 할 것입니다. 《시경()》 관저장()에 이르기를, ‘아리따운 아가씨는 군자()의 좋은 짝이다’라고 하였으니, 능히 정숙()하여 그 지조를 변치 않은 뒤에야 종묘()의 주인이 될 수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부정()한 여인은 보통 선비도 아내로 삼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데, 더구나 정절을 잃은 부인이 (어찌) 일국()의 국모로써 모범이 될 수 있겠습니까? 위()나라 문제()는 원희()의 처() 견씨()를 부인()으로 삼았고, 주()나라 세종()은 이숭훈()의 처 부씨()를 후()로 삼았습니다. 조비(, 위()나라 문제())는 본래 책망할 것도 없으려니와, 세종은 영명()하다고 일컬었는데도 실수한 것이 이와 같았으니, 이는 위나라나 주나라의 복록이 길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종은 선대의 법을 계승하기에 힘쓴 임금이었으나 왕비를 맞아 드리는 데에 있어서는 자못 부끄러운 덕이 있었으니, 소위 유후()라고 하는 이가 자기에게는 종자매()가 되기 때문에 숨기어 외성()으로 일컬은 것이 그 첫째의 실수이고, 전에 종실() 홍덕원군()에게 시집갔던 사람을 받아들여 왕비()로 삼은 것이 둘째의 실수이며, 몸을 버린 사람을 높이 떠받들어 종묘의 주인으로 삼은 것이 셋째의 실수입니다. 한 가지 일을 하는 데에 세 가지 실수를 하였으니, 실례 중에 또 실례를 한 것입니다. 옛날의 현명한 임금도 자기 아내에게 엄격하여야 나라를 다스릴 수 있었으니, 자기 집도 가르치지 못하면서 남을 가르치는 자는 없습니다. 성종이 비록 나라의 안정을 다소는 이룩하였으나, 후사()가 결국 끊겼으니, 진실로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애석한 일입니다.”


[신()등은 살펴보건대,]


"성종(成宗)은 힘써 행하고 조심하며 두려워해서 종묘와 사직을 세우고 적전(籍田)을 갈며, 학교를 설립하고 현재(賢才)를 권면하며, 절의를 숭상하고 백성들의 어려움을 구휼하며, 모든 제도를 일신(一新)하였으니, 가히 수성(守成)의 좋은 임금이었습니다."


[나의 평]

고려조 사관을 쓴 이제현과 당조(조선조) 사관들은 어째서 저런 왕을 명군으로 꼽는지 묻고 싶다. 본시 고려의 명군은 광종이며, 고려의 명신은 서희와 그의 스승 쌍기일 것인데 어찌하여 고려조와 조선조의 사관들은 최승로를 유직의 신하로 드높였는지. 묻고 싶으나 그나마 당조(조선조)의 사관들은 성종의 비가 곧 광종의 딸이라고 하니 성종은 유가의 탈을 쓰고 종횡을 하는 자일 것이다. 당조의 사관들이 사관을 논평한 이제현보다 그나마 나은 평을 했으니 다행이다. 최승로는 노비에서 양인이 된 자들중 죄를 저지른 자를 노비로 돌려보냈으나 문제는 그 주인들 또한 그 양인들을 원망하며 그 양인들을 핍박했음에도 어째서 이들은 관리하지 않았는지 의문이 든다. 환천을 무분별하게 하며 환천을 하고 싶으면 제대로 가려 환천을 하며 더욱이 부곡에 갇힌 양인들이 그토록 많으면 군현으로 포함시켜 양인을 양인보다 더 높게 하지 말아야 하거늘 어찌하여 부곡의 양인들은 보질 않는지 의문이 크며 더욱이 종횡을 일쌈던 호족들의 후손들을 다시 키워주며 그들이 무경에서 경계한 문벌이 되고 그들이 문신이 되어 붕당을 만드니 고려 성종을 비롯해 최승로는 민본의 절반만 얻고 절반만 얻은 자들이 유학을 논하는게 웃기기 짝이 없으니 논해본들 시끄러워지기 마련인 사문난적일뿐이다. 단 기존에 간신, 폐행, 반역과는 구별해 잘할 뿐이니 이들을 열전에 올린 것도 웃기기 그지 없다. 그래도 장헌공 서희가 강동 6주를 얻은 담대한 외교가 있었으니 실로 다행이며 최승로니 김심언인지 하는 자는 장위공 서희에 미치지도 못할 것이다. 성종은 단지 이를 신임한 것뿐이다. 또한 성종은 거란이 군사를 일으켜 고려를 치려할때 유가의 사상에서도 인정받는 손무자와 오자서의 울료자의 사상을 본받지 않았는지 어찌하여 과거에서 무예에 능한 자를 전 지역에 모아 이들을 가려뽑는 무과와 무경을 넣치 않았는지 정말이지 의문스럽기 그지없다. 울료자는 "그러나 지금 군왕은 위엄을 세우며 적에 대항할 의도로 서로 다투는 까닭에 전쟁을 그칠 도리가 없다. 전쟁은 무력을 줄기, 문략을 뿌리로 삼는다. 무력이 겉이라면, 문략은 속에 해당한다. 문무의 관계를 꿰면 승부의 큰 줄기를 장악할 수 있다. "라고 했다. 비록 문략을 쌓은 고려이고 뿌리만 있고 그 뿌리를 서희의 담판외교로 장위공 서희가 세웠으나 줄기는 엉망이고 부서지기 직전이었다. 김치양의 난을 비롯해 강조의 난을 김훈 최질의 난이 그러했다. 정국을 수습하긴 커녕 오히려 정국이 혼탁하기가 하늘을 찔렀으며 뿌리가 깊음은 물론 줄기까지도 있던 인헌공 강감찬이 귀주에서 승리로 간신히 이를 막은 것뿐이다.  단지 지방관을 파견하며 성씨간 결혼 같은 문란한 풍숙을 상당부분 없애려고 한 것은 그나마 치척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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