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원수에 대한 이야기와 공민왕이 폭군인 이유에 대한 논평과 나의 논평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이 나를 대신하여 군사를 출동하였었는데, 안우(安祐) 등이 감히 제멋대로 죽였으니, 이는 나를 안중(眼中)에도 두지 않는 것이다. 적을 파한 공은 한때 혹시 있을 수 있는 것이겠지만, 임금을 무시한 죄는 만세(萬世)에 용납되지 못할 바이니, 이런 자들을 그냥 두고 죽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후세에 교훈을 남기겠는가? 그런 까닭으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장차 도원수 안우와 원수 김득배·이방실에 대하여 전형(典刑)을 분명하게 바로잡으려 하나, 오히려 지난날의 노고를 생각하여 죄를 그의 처자(妻子)에게까지 미치게 하지는 않겠다. 그 관하(管下)에 있던 대소 관리들은 모두 유사를 시켜서 공을 참작하여 서용(敍用)하도록 하라.” 하였다.

[신등은 살펴보건대,]
“고려 5백 년 동안에 강한 도둑 떼들이 침범하여 거의 편안했던 해가 없었지만, 마침 영웅 호걸과 문무(文武)를 겸비하고 용력과 지략이 있는 재목들이 좌우에서 힘껏 주선하여 능히 외부로부터 받은 모멸(侮蔑)을 막아 국가를 진안(鎭安)시켰던 자가 있었으니, 이를테면 서희(徐熙)가 거란(契丹)을 평정한 것과 강감찬(姜邯贊)이 거란을 제어한 것, 윤관(尹瓘)이 여진(女眞)을 축출한 것과 조충(趙冲)·김취려(金就礪)가 요얼(遼孼, 거란의 유종(遺種))을 안정시킨 것, 박서(朴犀)·김경손(金慶孫)이 몽고를 물리친 것과 김방경(金方慶)이 왜구(倭寇)를 정난(靖難)시킨 것이니, 그들의 공이 사직(社稷)을 보전한 데에 있어 당시 임금의 의중(倚重)했던 바가 되었습니다. 지금 홍건적(紅巾賊)의 변란이 있어 우리의 도성(都城)을 넘어뜨리어 함락시키고 우리의 궁궐을 불태워 없어지게 하였으며, 우리 백성을 도륙(屠戮)하였는데, 여러 원수(元帥)들이 본래의 상태로 회복시키고 깨끗하게 숙청하였던 공은 또 지난번의 장상(將相)보다 더 큰 것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애석하게도 싸움에 이겼다는 소식이 겨우 전달되었는데, 총병관(摠兵官) (정세운이) 역적 김용(金鏞)의 도모한 바가 되었으며, 세 원수가 서로 연달아 해침을 당하였으므로, 온 나라의 사람마다 모두 김용의 살점을 씹고자 하였지만 그렇게 하지를 못하였으니, 왕은 어찌하여 살피지 않고서 명목이 없는 죄를 공이 있는 사람에게 더하여 죽임으로써 공에다 보답한다는 말입니까?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는 제문을 지어 애도하기를, ‘태산(泰山)과 같은 공(功)으로 하여금 도리어 칼날의 피가 되게 하였다.’고 하였으니, 대개 일찍이 공민왕(恭愍王)의 처사에 대하여 몹시 한탄하지 않음이 없었다 합니다.”

[나의 논평]
일찍이 무경에 《군참》에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군중에 물자가 없으면 병사가 귀부하지 않고, 포상이 없으면 병사가 참전하지 않는다. 《군참》에 그 배경을 설명한 말이 나온다. 향기로운 미끼로 고기를 유인하면 고기는 반드시 바늘을 물게 되어 있다. 두터운 상을 내리면 반드시 용사가 나오게 마련이다. 현사가 진심으로 귀부하는 것은 두터운 예우 때문이고, 용사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는 것은 두터운 포상 때문이다. 두터운 예우로 현사의 귀부를 종용하고, 두터운 상으로 용사를 부추겨야 구하고자 하는 자들이 오게 된다. 처음에는 크게 예우하다가 나중에 이를 바꾸면 현사가 오래 머물지 않고, 처음에는 크게 포상하다가 나중에 이를 바꾸면 용사를 뜻하는 바대로 부릴 수 없다. 두텁게 예우하고 포상하는 자세를 시종 관철해야만 현사와 용사가 죽음을 무릅쓰고 그 힘을 다하게 된다." 포상이 없으면 병사가 참전하지 않는다라고 하는데 정세운을 죽인 자를 가장 먼저 파악한 것은 3원수 중 하나인 문충공 김득배로 그는 “지금 겨우 도적들을 평정하였는데, 어찌 자신들끼리 서로 베어 죽이는 것이 마땅하겠는가? 옛날 전양저(田穰苴)가 제맘대로 장고(莊賈)를 죽였으나1), 위청(衛靑)은 소건(蘇建)을 죽이지 않았으니2), 이는 고금의 밝은 귀감(龜鑑)으로서 삼가지 않을 수 없다. 만일 부득이하다면 궐하(闕下)에 잡아다 놓고 주상(主上)의 처분을 듣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라고 했으나 안우, 이방실 두 장수는 왕명을 받지 않으면 반역자로 몰리게 되었다. 김용이란 자는 사지를 짖어 죽여야 함이 옳고 공민왕 또한 인당을 죽음으로 몰게하고 또 다시 이런 일을 반복하니 폐위를 당해야 할것이나 현자라고 불리는 목은 이색이라는 자의 행동이 매우 어리석기 그지 없는데, 그는 국왕의 명에 거역하면 그 역시 반역자로 몰리게 될까봐 [삼원수를 처벌하는 교서](죄삼원수교서(罪三元帥敎書))를 지은 것이다. 본시 문충공 김득배는 이색의 선배이자 스승이나 다름없던 사람이었다. 못해도 지인일 것이다. 같은 동료이자 지인과의 갈등 혹은 같은 문신들간 반목은 인과 의는 물론 신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사덕을 쌓고 동료 간에 서로 비방하며 배척하는 짓을 벌이는 자가 이색이라고 실수를 하면 반성하고 문충공 김득배의 가문에 사죄를 하며 공민왕을 폐위시켜야 함이 옳음에도 그러하지 않았기에 사덕으론 제 아무리 훌륭해도 그는 벼슬아치로 공덕을 쌓아야할 인물이나 오로지 사덕만 챙겼던 자이다. 본시 고려는 좌주니 문생이니 지공거니 동지공거니 하며 그것이 폐단이 되어 이름과 이름을 나누어 각기 파를 갈라 정쟁을 일쌈으며 고려 인종때는 그야말로 문신들이 이름을 갈라 싸우니 어지럽기가 태산같았으니 이는 정지상과 김부식 윤언이와 임원후와 의종을 올리려는 문신들과 싸움이 그 예이다. 무경에선 붕당과 국란을 이야기하는데 "《군참》의  말에 인하면 관원들이 붕당을 만든 뒤 가까이 지내는 자들을 승진시키고, 간사하고 부정한 자를 불러들이거나 천거하고, 어질고 현명한 인재를 억눌러 꺾어버리고, 작록을 수여하면서 공덕(公德)을 버린 채 사덕(私德)을 쌓고, 동료 간에 서로 비방하며 배척한다. 이를 일컬어 난리가 나는 원천인 난원(亂源)이라 한다." 헌데도 좌주니 문생이니 지공거니 동지공거니 하며 동료 간에 서로 비방하며 배척한 것이 문신들끼리 이토록 심하니 이런 참극이 벌어진 것이다. 이색이 바로 그런 자로 무인들을 대접하고자 무과를 신설하는 등 문신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고 했고 문아의 아름다움이 있으나 위기가 터지자 사덕을 쌓기에 급급하였으니 사덕만 쌓았을 뿐이다. 이로 인해 고려말 자신을 비롯해 여러 문신들이 유배를 당하고 죽음을 당하니 이또한 그의 책임이 매우 크다. 헌데도 논어에선 "하루 3번 반성한다"라는 것을 본인이 누구보다 잘 암에도 반성은 커녕 "나는 왕이 시켜서 한일이고 몰랐다"라고 했으니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정세운을 비롯해 안우와 이방실에 비하면 매우 후안무치하기가 극에 달한다. 일찍이 안우와 이방실이 비록 현명하지 못하나 홍건적을 격퇴하는데 큰 공을 세워 과를 덮어줘야 하고,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정세운을 비록해 음모에 빠져 누굴 죽이고 또 그들은 불행이도 음모에 빠져 죽으니 큰 공으로 과를 더욱 덮어줘야 한다. 그 한산백 이색은 자신의 선배이자 지인이 전장에서 공을 세울때 대체 무엇을 한것인지 의문이 들며 하루 3번 반성하라는 말을 싹 잊으며 오히려 잘못을 늬우치긴 커녕 몰랐다고 한다. 이들 관계에 틈이 생기자 음모를 저지르는 자는 김용이며 또한 공민왕은 그 다음 일것이다. 그들의 책임이 너무나도 막심해 그들을 폐위시키거나 쫓아내야 함이 옳다. 이후 흥왕사의 난으로 김용은 죽었으며 공민왕은 이후 실정을 저질러 홍륜에게 죽게되었으니 이때 공민왕을 따르지 않고 벼슬아치들이 중론을 모아 그를 폐위시키고 김용을 죽여 일찍이 공양왕을 옹립하지 않았고 뒤늦게나마 공양왕을 옹립하나 결국 고려의 멸망이 임박했다. 아 공양왕은 이러한 전왕의 실정의 무게에 죽으니 실로 안타깝기 그지 없다. 더욱이 공민왕의 하는 행실이 형인 충혜왕과 비슷하며 그 아들 우왕과 비슷하며, 전왕인 의종과 비슷하니 어째서 이런 왕을 폐위시키지 못하였는지 의문이 들 정도이다. 공민왕은 또한 이전에 북벌을 감행한 인당을 죽인 책임자임에도 남에게 의심을 받음이 옳으나 되려 남을 의심하니. 자신을 숨겨 남을 의심하여 사람을 죽인 자는 간교함에 의심이 더해져 그 간교함에 극치를 보이니 이것은 흡사 김보당의 난에서 김보당을 헐뜯으며 복위를 위해 자신의 실정에 뒤늦게 자신을 후회하며 김보당의 난을 틈타 복위하려다 죽음을 당한 의종과 같은 것이다. 안정복은 3원수를 싸잡아 비난하나 정작 이 책임자는 단연 김용이고 더 나아가 공민왕일 것이다.


대충 상황 1. 홍건적 격퇴 신나게 했음. 2. 정작 김용이 보낸 거짓 밀서로 3원수를 빌려 정세운을 죽임 3. 이후 김용이 정세운을 죽인자는 3원수라며 또 죽임 4. 이후 들통나서 김용이 반란을 일으킴 5. 이내 진압됨 6. 공민왕은 반성은 커녕 교활한 짓거리는 숱하게 믿을 사람이 없다며 또 자기 속이고 남 의심하는 버릇 도짐 7. 김용도 개새끼 공민왕도 개새끼, 8. 이색은 살아남았으면 자신의 선배인 김득배는 물론 4원수한테 석고대죄를 하든 뭘 하던 해야하는데 몰랐다고 철면피깜 이짓뿐만 아니라 이후 창왕 문제로 또 욕 바가지 처먹음 9. 유배당해서 죽을번했는데 살아남음.

뭔 전쟁에서 공 세우면 또 죽고 죽고 또 죽고 죽고 이전에 김경손 죽은거 계속 반복함. 고려라는 나라의 핵심이 보훈 정책인데 보훈 정책이 이렇게 쓰레기에 엉망이니 무신들이 위화도회군에 참여해서 왕씨 일족들 죽이고 그러지. 이게 무슨 무를 숭상하는 나라야. 무과도 없다며? 공민왕도 그냥 뭐 충혜왕이랑 비슷해처먹어서 그냥 공양왕 좋아하고 싶네.

참 고려조를 무경의 시각에서 논파를 해도 이건 시발 그냥 생겨처먹을 나라가 아니네....
한글을 남겼나. 무인들 대접을 했나. 문신이 전쟁까지 나갈 정도로 공 크게 세워도 죽여, 뭐 한게 없네. 와닿는게 하나도 없어. 진짜 왕건 그 새끼가 해처먹으려고 고려 세웠나봐. 하긴 그 인간이 무슨 고구려랑 연관이 있어. 호족들이 무슨 고구려랑 연관이 있어. 다 골품제로 지들 밥처먹기 힘들어지니까 반란 일으켜서 나중에 까부수고 지들끼리 해처먹어서 생긴 나라지. 툭까놓고 고려는 발해 왕족들 몫이지 왕건 그 새끼 몫이겠냐.  오기 전까지는 원래 고려는 고려도 아니였지. 그냥 고려세우고 나중에 김훈,최줄의 난때 대씨일가가까지 끼어들어서 왕씨일가 죽이고 왕조 바꿨어야 했음.


 



















무슨 지금 정권보는데 호족 새끼들이 잡은거 같아요. 정치/사회

자기 집안이나 가문들은 항일투쟁도 안했는데 유달리 친일 어쩌구 하는거나 뭐 견훤도 백제랑 상관도 없는데 후백제 참칭하다가 지가 스스로 나라세웠는데 지가 몇십년간 해쳐먹고 스스로 문닫았으니 고려니 후고구려니 하면서 왕건이니 궁예니 마치 호족 새끼들 보는거 같네요. 고려통일도 이민족들이나 여러 호족들이랑 다르게 여진족하고도 싸운 유금필이 다 한게죠. 둘째는 쌍기나 광종이 다 한거고 근데 유금필은 고려쪽 호족들이 유배먹이고, 쌍기나 광종도 호족들이 죽이지못해 안달랐죠.

신라의 골품이나 녹읍이 문제많죠. 귀족들 문란한거 사실이고
근데 그 새끼들 골품깼다고 자화자찬하면서 정권잡으면서 혜종, 정종 시절 한거없고 둘다 골로 보내고 골품대신에 지들이 골품보다 더 갑이었죠. 광종시절에도 제도 닦은거 순전히 귀화인 쌍기가 다 했죠. 툭 까놓고 혜종, 정종 시절 6년이 60년이든 저 새끼들도 말이좋아 뭐 5년 6년이지 60년이죠. 당장에 로스쿨 이런 병신제도나 행시도 없애겠다고 하죠

그러고 보면 우리 한국사에서 호족들이 질타를 안받아요. 그러니까 지금 정권잡는 새끼들이 다 호족새끼들이랑 하는 짓이 비슷하니 뭐니 그런거죠. 야당도 그렇고. 특히나 지금 졍권잡는 애들은 백제도 아닌주제에 후백제 참칭하는 호족새끼들이랑 비슷하지요. 나주오씨쪽이야 힘이 약했으니 그렇다쳐도 서필같은 가문이야 호족이라고 해도 이후 기득권 내려놓아서 그렇다쳐 문제는 후백제에 있다가 후백제 뒷통수깐 박영규 뭐 이런 새끼들이 문제죠. 고려내부나 신라내부에 있던 6두품 출신들이나 호족들이 문제죠.

진짜 지금 정권보니 후삼국시대 호족나부랭이들이나 6두품 나부랭이들이나 광종이전 고려나 그때새끼들 의식이랑 비슷하네요. 미국이 고려초에 화친보낸 거란같은 애들이고 북괴가 고려초나
중기에도 위협되는 여진족같은 애들이고.(참고로 북괴의 화전양면전술은 여진족이랑 비슷) 왜구야 그때나 지금이나 상종이 안되고 짱깨야 이후 통일된 나라랑 비슷해쳐먹고.

문신 김보당의 평가에 대한 나의 평가, 그리고 여몽연합군에 관련 평 역사

문신 김보당의 평가에

[신등은 살펴보건대,]
“사람을 잘 관찰하는 자는 그가 세운 공(功)의 성취와 실패를 관찰하지 않고, 그가 행하는 일의 옳고 그름과 마음쓰는 것의 사악하고 올바름을 관찰합니다. 마음이 진실로 올바르고 일이 진실로 옳다면 비록 공을 이룩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또한 취할 만하니, 김보당 같은 인물이 그런 예입니다. 그가 동남에서 군사를 일으켰을 때에 강개(慷慨)하고 발분(發憤)하여 반란을 일으킨 역적들을 토벌하고 군부(君父)를 구원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으니, 그의 마음씀을 올바르지 않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가 이경직·장순석·유인준의 여러 무리들과 함께 전왕을 받들어 대의(大義)를 일으켰으니, 명분과 의리가 바르고 순하였으며, 일 또한 옳은 데서 출발하였다고 말할 만한 자인데, 불행하게도 패배하여 자신이 죽는 데 이르렀으니, 참으로 애석하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그가 죽음에 임박하여 말한 한마디는 다시 문신들에게 화를 입히게 되어 산 자가 없게 만들었으니, 그 처음부터 끝까지 절개를 온전히 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큰 강령이 이미 올바랐으니, 어떻게 성취와 패배를 가지고 사람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김보당 같은 현명한 자가 오히려 열전(列傳)에 들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나의 평]
죽음에 임박하여 말한 한마디는 문신들에게 화를 입히게 되어 산자가 없게 만들었으니 문신들은 본시 제도의 정비를 하며, 학문을 퍼트려 나라의 지혜를 쌓게하는 신하들이나 그들의 문제는 미사여구를 좋아하며 언변으로 먹고 문예와 시에만 몰두하며 시류에 따라 바꾼다는 비판이 있으니 김보당이 그런 자이다. 해릉양왕과 비슷한 의종을 죽이기는데 앞장서는 난신적자들의 편에서면서 뻔뻔스럽게 난신적자들을 비판하여 반란을 일으키니 후자의 문신일 것이다. 한서(漢書)의 〈조충국전(趙充國傳)〉에 나오는 이야기대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을 것이다. 그는 본시 서한의 무장으로 여러 전공을 세움으로 한을 평안케했다고 한다. 이런 자가 현명하면 삼척동자도 현명할 것이다.  

여몽연합군에 관련 평

○문하 시중 김방경(金方慶)과 대장군 인공수(印公秀)를 원나라에 보내어 표문(表文)으로써 아뢰기를,
“소방(小邦)이 근래 역적들을 소탕하는 일로 인하여 몽고 대군의 군량미를 해마다 백성들에게서 거두어 들였으며, 게다가 왜국[倭邦]을 정토(征討)하려고 전함(戰艦)을 수리 건조하는 일 때문에 장정(壯丁)들은 모조리 공사 부역에 나가고 노약자들만이 겨우 밭을 갈고 씨를 뿌렸는데, 시절이 일찍이는 가물고 늦게는 큰물이 져서 곡식을 제대로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나라의 비용마저 피폐한데, 더구나 싸움에 다치고 물에 빠져 죽어서 돌아오지 못한 자가 많으니, 비록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느 세월에 소생(蘇生)될는지 기약할 수 없습니다. 만약 다시 일본을 치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에 필요한 전함과 군량미를 실로 소방에서 능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삼가 간절한 정성을 굽어살피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나의 평]
무경에선 만천과해라는 말이 있고, 일찍이 공자께선 "큰 바다를 보지 않고서야 어찌 빠져죽는 근심을 알겠느냐? 큰 바다를 보지 않고서야 어찌 풍파에 시달리는 근심을 알겠느냐?"라고 했으니 비록 고려가 세워지고 이때까지 고려는 땅의 소중함은 잘 알아도 바다의 소중함은 이리도 몰랐다는게 한심하기가 그지 없다. 비록 여진족과 싸우기 위해 바다에서 싸움이 있었으나 그 규모는 크지 않았고, 오히려 몽고같이 바다도 모르던 오랑캐들 따위가 바다를 건널 전함을 건조하라 지시하니 이제서야 만들기 시작하나 백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으니 실로 기가막히기 그지없고 그리하여 저러한 참혹함을 나은 것이다. 이는 몇백년전 고려가 바다에 대해 준비를 할 배들을 만들어야 했으나 그러한 노력이 전대의 신라만도 못하며 본시 고려는 삼면이 바다이자 땅보다 더 큰 바다를 위해 배와 전함을 백성들의 편리를 위해 병사들의 계책에 다양화를 위해 만들어야 하나 그러하지 못했다. 비록 녹읍이 부활해 혜공왕 이후 엉망이 되었지만 신라의 수군과 배는 당나라조차도 인정을 하며 왜구들조차 두려워하였으나 신무왕과 장보고가 바다를 이용해 배를 만들고 수군을 만들어 해적들을 정리하고 난신적자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하나 고려조에는 그러한 기세가 꺽히기 시작해 이 지경이 되었던 것이다. 강화도에서 난신적자들은 나무를 심고 또 심어 많은 백성들이 도륙되었을때 신무왕과 장보고처럼 배를 만들어 저들을 정리하지도 못했다. 또한 거란보다는 신라와 해전을 펼친 신라조에 왜구와 해전을 펼친 여진을 적으로 대해야 하기에 바다를 위해 고려는 일찍이 전함을 절차에 따라 오랜기간을 준비해 만들어야 하나. 공자께서도 아는 바다의 소중함을 오래전부터 고려는 이리도 모르니 바다도 모르는 거란과 몽고와 전란으로 이토록 고통을 받는 것이다. 고려는 삼한이 바다에 적게는 몇백에서 많게는 몇천개의 섬이 있음에도 더욱이 몽골을 바다에 치거나 바다를 이용해 정벌하면 필시 그들의 진격로는 끊어지며 우리의 진격로는  더 확보될 것이나 그것에 쓰일 나무들을 사찰건립에 쓰기 급급하였고 별궁과 정자를 만드는데 급급하였으니 이토록 참담한 결과를 맞이한 것이다. 몽고가 전함을 건조하라 지시하고 이제서야 만들기 시작하나 또 백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고, 그 과정이 실로 기가막히나 오래전부터 백성들을 위해 이것을 준비하지 못한 고려에 크나큰 책임을 물어야 할것이다. 김방경이 기뻐하지 않은 것이 당연한 것이다.







고려 현종에 대한 평과 강감찬에 대한 평에 대한 나의 평 역사

○안서도(安西道)의 둔전(屯田) 1천 2백 40결(結)을 현화사(玄化寺)에 시주(施主)하자 양성(兩省)에서 재삼 논박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신등은 살펴보건대,]
“둔전은 군민(軍民)을 중히 여기는 소이(所以)인데, 현종은 양성(兩省)의 논의를 배척하고 둔전을 절에 바쳤으니, 이는 백성을 중히 여기는 것이 부처를 중히 여기는 것보다 못한 것입니다. 임금이 다스리는 나라가 백성을 사랑하는 도리를 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은 부처를 좋아하는 임금으로 불리워졌으나, 오히려 백성들이 전답을 절에 시주하는 것을 금하였는데, 지금 왕은 비단 금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바치기까지 하였으니, 문무왕에게 미치지 못함이 멀 것입니다.”

[사신(史臣) 최충(崔冲)이 말하기를,]
“전(傳)에 일컫기를 ‘하늘이 장차 흥(興)하게 하려고 하면 그 누가 능히 폐(廢)하리요?’ 하였다. 천추 태후(千秋太后)가 멋대로 황음(荒淫)하여 몰래 나라를 빼앗으려 도모하였는데, 목종(穆宗)이 백성들의 촉망(屬望)을 알고는 천추 태후의 악당(惡黨)을 배척하고, 멀리 사신을 빨리 보내어 신기(神器)를 받도록 하여 본지(本枝)를 굳게 하였으니, ‘하늘이 장차 흥하게 하려고 하면 누가 능히 폐하리요?’라고 한 말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 이모(姨母, 천추 태후)가 끼친 화(禍)로 말미암아 무신(武臣, 강조(康兆))이 반역을 꾸미고 강린(强隣, 거란)이 틈을 엿보아 침범하여, 대궐이 모두 불타고 승여(乘輿)가 도성을 떠나 피란하였으니, 고난과 불행의 극도에 달하였다. 반정(反正) 이후에 오랑캐와 우호를 맺어 무(武)를 쉬고 문(文)을 닦았으며, 부세(賦稅)를 박하게 하고 부역을 가볍게 하며, 준수한 인재를 등용하고 정사를 공평하게 수행하여 내외가 평안하고 농상(農桑)이 자주 풍년이 들었으니, 중흥(中興)의 임금이라 말할 수 있겠다.” 하였다.

[이제현(李齊賢)이 말하기를,]
“최충(崔冲)의 말은 세상에서 이른바 ‘천명(天命)’이라 하는 것이다. 월(越)나라 구천(勾踐)은 쓸개를 핥으며 (오부차(吳夫差)에게 회계산(會稽山)에서 패한) 치욕을 씻었으며, 소백(小白, 제 환공(齊桓公))은 (옛날 화를 피해) 거(莒) 땅으로 도망하였던 일을 잊어버리어 (사후(死後)에) 제(齊)나라에 환란을 남겼었다. 임금이 천명(天命)이 있을 것만 믿고서 욕심대로 하여 법도에 어긋난 짓을 한다면 비록 천명을 얻더라도 반드시 잃을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다스려질 때 어지러움을 생각하고 편안할 때에 위태로움을 생각하며, 끝을 조심하기를 처음처럼 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명령을 대양(對揚)하였으니, 현종같은 임금은 흠을 잡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였다.

[나의 평]
절이 곳곳에 널부러지고 또 널부러짐에도 백성들의 땅을 또 절에 바치며 땅을 주는 모습이 제 아무리 불자였던 문무왕도 그러지 않았으나 문무왕보다 미치지 못하다는 소리를 들으니 이 왕이 과연 중흥이라고 칭할 왕이라고 할지 의문이다.. 그 옛날 신라조의 왕과 비교가 되니 태조부터 시작해 현종조까지 현종이야말로 최고의 군주로 꼽으나 현종이 그 전조의 왕 문무왕보다 못하니 이후 나머지 왕들은 어느 수준인지 짐작이 갈 정도로 답이없을 지경이다. 중흥의 군주조차도 이 지경이니 이후 좋은 왕들은 얼마나 나올지 심히 의심이 될 정도이다. 나라의 지엄한 법이 제 아무리 있어본들 황룡사에 거대한 탑과 여러 사찰이 있으니 나라의 지엄한 법도가 너무나도 아까울 지경하다. 제 아무리 100개의 제도가 있으면 뭣하겠나? 유가가 있어본들 뭣하겠나? 그 유가의 제도를 1개라도 지키지못하면 그 100개에 있는 유가의 제도는 겉치레일뿐이고, 지키지도 못하며 잃는 것은 신의일 것이다. 또한 김훈 최질이 제 아무리 난신적자라고 해도 고려사 열전에선 그를 반역에 넣지 않은 것은 그들도 거란군을 격퇴한 공로가 크기 때문이다. 이는 고려 현종에게도 잘못을 묻기 위해 이러한 것이라 보여진다. 문아에만 빠지고 문신들을 위해 공을 세운 자들에게 그들의 계급을 상장군 이상으로 올려야 함에도 도리어 재산을 손대어 인헌공 강감찬과 같은 문신임에도 결단하여 싸우며 거란을 격퇴시킨 것과 달리 도망가기 급급한 여러 문신들을 챙기기 급급하니 "《군참》에 나오는 이야기로 군중에 물자가 없으면 병사가 귀부하지 않고, 포상이 없으면 병사가 참전하지 않는다." 라고 했으니 이는 병사를 비롯한 장수가 포상이 없음을 넘어 재산을 손대기에 참전을 안함을 넘어 화가 미치니 그때 고려가 끝나지 않은 것이 신기할 것이며 또한 무예에 능한 자들은 전국에 모아 다시 뽑아 무과를 신설함은 이미 당대 송나라는 물론 전왕조인 당나라도 그러했으나 당나라 초기보다 못하니 이들이 무덕과 무예로 무과에 급제하고 중앙의 벼슬에 올라 공을 세우고 포상을 하며 계급을 올려야함에도 그러지 못하였으니 뿌리만 있을뿐 줄기는 없을 뿐이다. 몇백년전 중원의 나라만도 못한 제도를 가지니 거란과 전쟁에서 이김이 괴이함을 넘을 정도이다. 최충은 어찌하여 충흥이라고 말하며 이제현은 이런 왕이 어찌하여 흠을 잡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지 심히 의심스럽다.

○시중(侍中)으로 치사한 강감찬(姜邯贊)이 졸하였다. 강감찬은 금주인(衿州人)으로 성품이 청검(淸儉)하여 산업(產業)을 경영하지 않았으며, 젊어서 학문을 좋아하고 기략(奇略)이 많았다. 체모가 왜소하고 누추한데다 의상(衣裳)이 남루하여 보통 사람에 지나지 못하였으나, 정색(正色)하고 조정에 서서 큰 일에 임하여 대책(大策)을 결정할 때에는 우뚝하여 나라의 주석(柱石)이 되었다. 나이 70에 궤장(几杖)을 하사하고 3일에 한 번 조회하게 하였는데, 드디어 사직하고 성남(城南)의 별장으로 돌아가 졸하니, 나이 84세였다. 뇌사(誄詞)를 내려 조문하고 부의(賻儀)를 매우 후하게 주었으며, 시호를 인헌(仁憲)이라 내리고, 백관(百官)에게 명하여 회장(會葬)하게 하였다. 현종의 묘정에 배향(配享)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
“대단하도다. 하늘이 백성을 사랑함이여! 국가에 장차 화패(禍敗)가 닥쳐올 때는 반드시 유명한 현인을 출생시켜서 대비하게 한다. 기유년(己酉年, 1009년 목종 12년)·경술년(庚戌年, 1010년 현종 원년)의 해를 당하여, 역신(逆臣)이 반란을 꾸미고 강한 적이 침노해 와서 내홍(內訌)·외란(外亂)으로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웠는데, 이때에 강공(姜公)이 있지 않았더라면 나라가 장차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공이 들어와서는 모의(謨議)에 참여하고 나가서는 정벌(征伐)을 관장하여, 화란을 평정하고 삼한(三韓)을 회복하여 종사(宗社)와 생민(生民)들이 영원히 의뢰하게 하였으니, 하늘이 출생시켜 이 사람들에게 닥칠 화를 대비시킨 것이 아니라면 그 누가 능히 이렇게 하겠는가? 아! 성대하도다. 세상에 전하기를, ‘한 사신(使臣)이 밤에 시흥군(始興郡)에 들어가 큰 별이 인가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는 관리를 보내 가서 보게 하였더니, 마침 그 집 부인이 아들을 낳았으므로, 사신이 마음속으로 이상하게 여겨 데리고 돌아와 기르니, 이가 바로 강감찬이다.’ 하였는데, 후에 송나라 사신이 강감찬을 보고는 모르는 사이에 내려와 절하면서 말하기를, ‘하늘에 문곡성(文曲星)이 오래 보이지 않더니, 이제 여기에 있었구려.’ 하였다. 이 이야기가 황당한 듯하나, 부열(傅說, 은 고종(殷高宗) 때 현상(賢相))은 기·미성(箕尾星)의 정기이고, (주 선왕(周宣王) 때 어진 제후) 신백(申伯)과 보후(甫侯)는 숭악(崧岳)이 신(神)을 내리어 태어났다고 하였는데, 유독 강감찬에게만 의심할 것이 무엇인가?” 하였다.

[나의 답변]
문신임에도 귀주에서의 대승이 심히 위대하고 위대하니 이 모든 것에 공로는 현종이 아닌 인헌공 강감찬에게 돌아가야 할것이다. 일찍이 서희공이 강동6주를 얻으며제일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란 손무자의 말대로 비단 물러나게 함은 물론 거란에게 강동 6주를 얻어내니 손무자가 말하는 최고의 신하가 나왔을때 이후 인헌공 강감찬이 뒤를 미리 20만을 준비하여 10만의 대군을 물리쳤는데 그 피해는 엄청나 살아돌아남은 자 소수라 했으니 으뜸의 문신일 것이다. 최승로니 김심언이니 이러한 자들은 입으로 충언을 하며 대체 장의공 서희와 인헌공 강감찬보다 잘난게 무엇이길래 이리도 극찬을 받는지 의심된다. 장희공 서희의 말에 의미심장한 것은 본시 고려는 발해를 위한다면 발해가 멸망할때 그틈을 노려 독립한 여진을 복속시켜야 함이 옳음에도 고려 태조는 금수의 나라를 여진으로 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신라조에 끊임없이 침략과 물리침을 반복하여 삼한을 흔들었던 왜구들을 금수로 삼아야 함에도 어찌된 영문인지 거란의 사신이 오랑캐라고 불리는 것과 달리 행패를 부리지 않으며 예의를 보이며 왔던 것은 필히 그때에도 강동 6주와 여진의 방도를 묻고자 온것이 거란의 1차 침입때 사나워진 기세로 겁박하던 소손녕이 방책을 세워 물러났으나 그 이전 고려태조의 방도가 장헌공 서희만도 못하니 이 전란은 있어야할 하등의 이유가 없으며 고려의 피해는 실로 어마해서 만들었으나 전해지지 않은 실록이 불타거나 궁궐이 붕괴하는등 이 책임은 고려태조부터 고려현종등 모든 왕들에게 물며 외척인 헌애왕후와 김치양등은 이 책임에서 말할 것 없이 사지를 토막내 죽여야 할것이다. 결국 뒷감당은 서희와 강감찬 두 사람이 하였으니 고려태조의 방책이 서희,강감찬에 따라가지 못하니 실로 한심스럽기 그지 없다. 왕이 신하를 넘기는 커녕 신하가 왕 중에 왕이 되고 왕이 신하만도 못하여 이런 지경에 빠지게 되었다. 또한 그들은 본시 무관으로 활약하여 그들에게 무예와 무경을 뽐낼 과거를 통해 무관으로 만들어야 함에도 그들은 문신이니 실로 안타깝기가 하늘을 찌를 뿐이며 이를 빌미로 무신들을 핍박하니 김훈, 최질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들이 있어서 고려가 있는 것은 고려는 단지 소수로부터 지켜내는 나라일 뿐인 것이며, 그들의 대단하고, 또한 그들 못지않게 하공진과 양규의 공로 높혀야 할것이다.

뭐 이거 고려 왕조 중에서 제대로 된 왕이 하나부터 없네 태조부터 시작해서 현종까지. 그나마 낫다는 광종도 저 지경이네, 휴...그냥 조선 세종이 좋은게 세종이 성군이라는 것은 둘째쳐도 뭐 전부 다 합쳐도 세종을 따라올까 말까할 지경이네. 이후 고려 문종이 나오긴 해도 문종도 쓰잘데기 없는 절간을 숱하게 만들었지. 뭐 고려왕들이 다 하나같이 저 지경이야. 통일의 의미가 없네. 하긴 통일도 순전히 적국에 딸바치고 적국이 자기한테 딸바치고 이러다가 하나 하나 통일한거지. 적이었던 호족들도 다 이런 식으로 정략결혼. 그냥 조선왕조가 나은게 아니라 고려왕조가 너무 쓰레기일정도로 조선왕조가 낫네. 무슨 이런 나라가 200~300년만 가도 토가 나오는데 무려 500년 가까이 해처먹네, 이 정도로 썩은 나라를 통일 체제에서 무려 500년 가까이 지속하는거보니 답이 없구만. 발해처럼 그냥 300년 가까이 해먹고 끝내야지. 이성계 장군같은 사람이 1명만 나오는게 아니라 5명은 나와야 할듯.


  
 







김훈 최질의 난에 대한 평가와 나의 평. 역사

○상장군(上將軍) 김훈(金訓)·최질(崔質) 등이 여러 위(衛)의 군사를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중추원사(中樞院使) 장연우(張延祐)와 일직(日直) 황보유의(皇甫兪義)를 귀양보냈다. 경술년(庚戌年, 1010년 현종 원년) 전쟁 이래로 병력수를 더 늘리니, 이로 말미암아 백관의 녹봉이 부족하였다. 황보유의 등이 건의하여 경군(京軍)의 영업전(永業田)을 빼앗아 백관의 녹봉에 충당시키니, 무관(武官)들은 자못 공평치 못하다는 생각을 가졌다. 최질은 또 변방의 공훈으로서 누차 무관에는 임명되었으나 문관(文官)으로는 될 기회가 없어서 항상 마음에 불평을 품었다. 이 때에 이르러 김훈과 최질 및 박성(朴成)·이협(李恊)·이상(李翔)·이섬(李暹)·석방현(石邦賢)·최가정(崔可貞)·공문(恭文)·임맹(林猛) 등이 영업전을 빼앗긴 것을 가지고 여러 사람들의 분노를 격동시키고 여러 위(衛)의 군사들을 꾀어서 북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대궐 안에 난입하여, 장연우와 황보유의를 결박하고 매를 때려 거의 죽게 하고는, 합문(閤門) 안으로 들어가서 임금에게 직접 호소하기를,
“황보유의 등이 우리의 전지를 빼앗아 차지한 것은 실제 자신들의 이익을 꾀한 것이지 특별히 공가(公家)의 이익을 위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발꿈치를 잘라서 신발에 맞춘다면 사체(四體)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모든 군인들이 흉흉(洶洶)하여 이루 말할 수 없이 분하고 원망스럽게 생각합니다. 청컨대 나라의 좀[蠹]을 제거하여 모든 사람들의 심정을 쾌하게 하소서.”
하니, 왕이 여러 사람의 뜻에 어긋났음을 중시하여, 그들의 청에 따라 장연우와 황보유의를 제명(除名)시켜 유배(流配)하였다.

○을유일(乙酉日)에 어사대(御史臺)를 폐지하고 금오대(金吾臺)를 설치하였으며, 삼사(三司)를 폐지하고 도정서(都正署)를 설치하였으며, 무관(武官)으로 상참관(常參官) 이상은 모두 문관(文官)을 겸하게 하였는데, (이는 모두) 김훈(金訓) 등의 청원에 따른 것이다.

[신(臣)등은 살펴보건대,]
“나라가 나라답게 되는 것은 형정(刑政)이 있고 기강(紀綱)이 있기 때문입니다. 형정이 없으면 능히 착한 사람을 상주고 악한 사람을 벌줄 수가 없게 되어 악한 짓을 하는 자가 많아질 것이며, 기강이 없게 되면 능히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아래 사람들을 부릴 수 없게 되어 신분에 어긋나는 짓을 하는 자가 많아지는 것입니다. 현종(顯宗)은 강조(康兆)가 자기를 왕으로 맞이하여 세워준 계책을 덕으로 여겨 그에게 반역의 죄를 가하지 않았다가, 마침내 강구(强寇)의 변(變)을 자초하여 수레를 타고 파천(播遷)까지 하는 치욕을 당하였으니, 역시 스스로 반성했어야 옳았습니다. 그리고 남쪽으로 순행하게 되어서는 여러 불량한 무리들이 누차 행궁(行宮)을 침범하였으나 모두 방치한 상태로 문책하지도 않고 고식(姑息)적인 은혜를 보였으니, 악한 짓을 하는 자가 어떻게 징계되고 다스려질 수 있겠습니까? 김훈(金訓)·최질(崔質)은 모두 항오(行伍)의 가운데에서 기용(起用)되어 외람되게 여러 장수의 반열에 끼었으나, 문관(文官)이 되지 못한 것을 가지고 억울한 마음을 깊이 품고 괴이한 말을 만들어 여러 사람의 분노를 격동시켰으며, 군사를 일으켜 대궐로 향하여 가서 지존하신 임금을 경동(驚動)시키고 대신(大臣)들을 마구 때렸으니, 음흉(陰兇)함이 극을 다하여 난역(亂逆)이 이미 나타난 것입니다. 임금이 마땅히 대중이 보는 앞에서 (그들을) 죽여 온 나라에 사죄케 해야 옳았을 것인데, 도리어 포학한 기세에 위협 당하여 침묵만을 지키며 손을 모아잡고 앉아서 난리를 평정하여 질서를 회복시키지 못하였으니, 충신(忠臣)과 의사(義士)는 분심(憤心)을 품고 몹시 애석하게 여겼으나, 또한 한둘의 장상(將相)이나 재신(宰臣)들이라도 대의(大義)를 부르짖고 난역(亂逆)을 토벌하여 왕을 호위하는 자가 없었고, 반역자가 태연히 방자하게 굴어도 누가 감히 나무라지 못하였으니, 나라의 형정(刑政)이 있다 하겠으며 나라의 기강이 있다 하겠습니까? 왕이 나약하여 결단성이 없음이 이미 이와 같고 무신(武臣)의 교만하게 날뜀이 또 이와 같아서 위에서는 능멸 당하고 아래에서는 침체되어 다시 떨치어 일어나지 못하였으니, 어사대(御史臺)를 없애고 금오대(金吾臺)를 세웠으며, 삼사(三司)를 폐지하고 도정서(都正暑)를 설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노병(老兵)·추졸(麤卒)들이 모두 문관직을 겸임하여 요직에 포진하고 있어서 기세를 부리니, 종기가 이미 심장에 응결(凝結)되어 거의 약으로는 치료할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후일 서경(西京)에 행행(行幸)할 때, 이자림(李子琳)·김맹(金猛)이 기이한 계책을 바치어 김훈(金訓)의 역당들이 모두 도륙(屠戮)된 것은 다만 한 때의 요행으로 나왔을 뿐이니, 임금이 하늘을 받들어 죄인을 토벌하고 난신(亂臣)을 주벌하여 폭력을 금하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아! 사람들은 한갓 무관들이 문신을 죽이고 스스로 그 관직을 가진 일이 의종조(毅宗朝)에 있었던 것만을 알 뿐이고, 이날 관부(官府)를 바꾸어 놓을 때 이미 화가 터전을 잡게 된 것은 알지 못하였으니, 어찌 현종(顯宗)을 위하여 애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와전된 말로 북산(北山)의 여러 절 중[僧]이 군사를 동원하여 온다 하니, 경성(京城)에서 크게 놀라 경계를 엄중히 하였다

[나의 평]
고려 광종은 과거를 통해 훌륭한 신하들을 배출해 마침내 장헌공 서희와 인헌공 강참찬을 뽑으며 고려의 뿌리를 지켰으나 노비에서 안검된 자들은 본시 경서와 서경 등에 능하지 못한 자들이 여럿이었다.. 더욱이 그들은 본시 노비이나 창칼을 다루는 자들이 꽤 쓸만한 양인들이 많았으니 무예에 능숙한 자들을 과거로 뽑고 경서와 서경보다 더 익히기 쉬운 중국의 병서인 무경을 익히도록 하여 무덕을 쌓은 자들을 늘려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광종은 괴이하게도 이것을 하지 않았으니 노비가 된 자 양인이 되어도 제 아무리 병졸이 된다손치더라도 공을 세워본들 출세의 길은 보장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제 아무리 뿌리를 지켜본들 줄기는 이토록 썩었고 참담하니 비록 김훈과 최질이 난신적자이나 반역 열전에 그들의 이름이 오르지 않은 것은 필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수나라는 무예에 능한 자들을 동네아무개나 뽑고 골라 고구려를 침략했으나 처참한 실패를 맞보고 망하였으며 당나라 태종도 치세를 쌓음에도 이후에 그러한 것을 하지 않았기에 또 다시 처참한 실패를 겪어 후세에 웃음거리를 자랑했다. 이후 당나라 무후가 부끄러운 덕이 많으나 뜯어고치며 전 지역에 무예에 능한 자들을 뽑아 그중에 훌륭한 자들을 뽑아 이러한 일들을 막으며 당 현종의 치세또한 이러한 것이 있었던 것이기에 가능했다. 비록 저 중원을 장악한 당나라는 땅이 넓어 안사의 난이라는 치욕을 당하였고 혼란을 겪으나 망하지는 않았고 송나라 태조가 다시 세워 중원은 이어나가고 이후 무에 관해 다시 정리하여 전조와 달리 제대로 된 무신들을 만들 수 있었다. 이럼에도 고려의 왕들이나 문신들 중 최승로, 김심언이니 하는 자들은 이러한 것을 뜯기는 커녕 하는 것도 없이 겉으로만 보이는 문에 치중하여 요행에 따라 그저 피할 수 있는 시무니 무엇이니 쓰니 이러한 일들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무가 문란해주고 대접받을 자들 못받고 대접받지 않을 자들 대접받고, 상벌의 구별이 없어지니 하공진과 양규같은 무신들을 제외하곤 저런 자들이 나온 것이다. 김훈과 최질의 잘못을 따지기 전에 문신들이 병을 통솔하고 무신들은 저렇게 공을 세워도 상장군만 오를 수 있는 참담하기 그지 없는 병체제를 뜯어고치고 문아에만 치중한 과거에 무를 넣어야 하고 군 행정도 병마와 수군등의 절도사를 만들어야 하나 이또한 없어졌으니 참으로 참담하기가 그지없다. 저 반란으로 인해서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반성하고 잘못을 해야한다 당조(조선조)의 문신들도 이것에 문제를 그 누구도 삼지 않아 추가로 적는 것이다.


고려시대 군인들에 대한 대우가 참 썩고 썩었네요. 지금도 마찬가지로 북괴에 도발에 대응한 장수는 1대 정부부터 지금까지 공을 주기보단 해임을 시켰죠. 그냥 저 고려왕조가 하나부터 열까지 500년과 600년 700년까지 똥이라는 똥은 다 싸는군요. 말이 좋아 고려왕조지 뭐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정권이네요.

이런 왕조는 수나라처럼 한번 역사를 병신으로 만들어놓아야 정신을 차릴 것인데, 조선왕조도 본시 그러려고 했으나 다른 문신들이 가문빨 내세워 욕먹기 싫으니 세가로 만족했지요. 뭐 고려가 병신이니 결국 조선이 병신이 된거군요. 아 왕고 새끼들 진짜 싫다. 다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안드네...한글도 없어 토지제도도 더 썩었어 더 문치주의에 진짜 누구 말대로 없는게 낫네.









 


고려 성종에 대한 평에 평. 역사

[이제현()이 찬()하기를,]
“성종()은 종묘()를 세우고 사직()을 정하였으며, 태학()에 학비를 넉넉히 주어 선비를 양성하고, 복시()를 시행하여 인재를 선발하였으며, 수령()을 독려()하여 그 백성들을 구휼()하고, 속을 아름답게 하였다. 매양 수찰(, 친필 교서)을 내릴 때마다 글뜻이 간곡하여 풍속을 개혁하는 것으로써 임무를 삼았다. 거란이 우리나라를 집어삼킬 생각으로 장수를 보내어 침략하였을 때, 즉시 서도(西)에 행차하여 안북부()에 군사를 내보냈던 것은, 곧 구준()이 전연()에서 취한 계책이었다. 그가 관방()을 절령()으로 옮기고 쌓아두었던 곡식을 대동강()에 버리려고 하였던 것은 당시 용렬한 신하의 의논일 뿐이고, 필시 성종()의 본 뜻만은 아닐 것이다. 지난날에 만약 최승로()의 글을 보고 기뻐하여 그를 추구()하여서 헛된 과장을 버리고 독실한 것에 힘쓰며, 옛 도()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백성들의 생각을 혁신하는 정책을 추구하고, 이를 실천하는 데 게으름이 없는 동시에 빨리하려는 마음까지도 경계하며, 몸소 행하고 마음으로 터득하여 자신을 미루어서 남에게 미치게 하였더라면, 제()나라가 변하여 노()나라에 이르고, 노나라가 변하여 도()에 이르는 (것과 같이 나라의 풍속이 일신됨을) 바랄 수 있었을 것이다. 소손녕()이 자신들의 능력을 과신하고 (성종이) 백성들의 일을 돌보지 않는다고 무함하여 명분 없는 군사를 일으켰으며, 이지백()은 어찌하여 나라의 풍속을 개혁하지 않아야 적()을 물리치는 계책이 된다고 끌어댈 수 있었을까? 그러나 그가 아직 늙지도 않아서 후계자를 세운 것은 국가를 위한 생각이 큰 것이었으며, 죽음에 임해서도 함부로 대사()하는 것을 아꼈으니, 죽고 사는 이치를 통달하였던 것이다. 이른바 (일찍이 최승로가 보기에 임금이) ‘뜻을 가지고 있어서, 그와 더불어 정치를 잘 할 수 있다’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 훌륭하다.” 하였다.


[신()등은 살펴보건대,]
“본사()에 성종()의 후()를 이른바 유씨()라고 일컬은 것은 곧 광종()의 딸입니다. 무릇 사람이 배필을 만남은 생민()의 시작이요 만복()의 근원이라 할 것입니다. 《시경()》 관저장()에 이르기를, ‘아리따운 아가씨는 군자()의 좋은 짝이다’라고 하였으니, 능히 정숙()하여 그 지조를 변치 않은 뒤에야 종묘()의 주인이 될 수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부정()한 여인은 보통 선비도 아내로 삼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데, 더구나 정절을 잃은 부인이 (어찌) 일국()의 국모로써 모범이 될 수 있겠습니까? 위()나라 문제()는 원희()의 처() 견씨()를 부인()으로 삼았고, 주()나라 세종()은 이숭훈()의 처 부씨()를 후()로 삼았습니다. 조비(, 위()나라 문제())는 본래 책망할 것도 없으려니와, 세종은 영명()하다고 일컬었는데도 실수한 것이 이와 같았으니, 이는 위나라나 주나라의 복록이 길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종은 선대의 법을 계승하기에 힘쓴 임금이었으나 왕비를 맞아 드리는 데에 있어서는 자못 부끄러운 덕이 있었으니, 소위 유후()라고 하는 이가 자기에게는 종자매()가 되기 때문에 숨기어 외성()으로 일컬은 것이 그 첫째의 실수이고, 전에 종실() 홍덕원군()에게 시집갔던 사람을 받아들여 왕비()로 삼은 것이 둘째의 실수이며, 몸을 버린 사람을 높이 떠받들어 종묘의 주인으로 삼은 것이 셋째의 실수입니다. 한 가지 일을 하는 데에 세 가지 실수를 하였으니, 실례 중에 또 실례를 한 것입니다. 옛날의 현명한 임금도 자기 아내에게 엄격하여야 나라를 다스릴 수 있었으니, 자기 집도 가르치지 못하면서 남을 가르치는 자는 없습니다. 성종이 비록 나라의 안정을 다소는 이룩하였으나, 후사()가 결국 끊겼으니, 진실로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애석한 일입니다.”


[신()등은 살펴보건대,]


"성종(成宗)은 힘써 행하고 조심하며 두려워해서 종묘와 사직을 세우고 적전(籍田)을 갈며, 학교를 설립하고 현재(賢才)를 권면하며, 절의를 숭상하고 백성들의 어려움을 구휼하며, 모든 제도를 일신(一新)하였으니, 가히 수성(守成)의 좋은 임금이었습니다."


[나의 평]

고려조 사관을 쓴 이제현과 당조(조선조) 사관들은 어째서 저런 왕을 명군으로 꼽는지 묻고 싶다. 본시 고려의 명군은 광종이며, 고려의 명신은 서희와 그의 스승 쌍기일 것인데 어찌하여 고려조와 조선조의 사관들은 최승로를 유직의 신하로 드높였는지. 묻고 싶으나 그나마 당조(조선조)의 사관들은 성종의 비가 곧 광종의 딸이라고 하니 성종은 유가의 탈을 쓰고 종횡을 하는 자일 것이다. 당조의 사관들이 사관을 논평한 이제현보다 그나마 나은 평을 했으니 다행이다. 최승로는 노비에서 양인이 된 자들중 죄를 저지른 자를 노비로 돌려보냈으나 문제는 그 주인들 또한 그 양인들을 원망하며 그 양인들을 핍박했음에도 어째서 이들은 관리하지 않았는지 의문이 든다. 환천을 무분별하게 하며 환천을 하고 싶으면 제대로 가려 환천을 하며 더욱이 부곡에 갇힌 양인들이 그토록 많으면 군현으로 포함시켜 양인을 양인보다 더 높게 하지 말아야 하거늘 어찌하여 부곡의 양인들은 보질 않는지 의문이 크며 더욱이 종횡을 일쌈던 호족들의 후손들을 다시 키워주며 그들이 무경에서 경계한 문벌이 되고 그들이 문신이 되어 붕당을 만드니 고려 성종을 비롯해 최승로는 민본의 절반만 얻고 절반만 얻은 자들이 유학을 논하는게 웃기기 짝이 없으니 논해본들 시끄러워지기 마련인 사문난적일뿐이다. 단 기존에 간신, 폐행, 반역과는 구별해 잘할 뿐이니 이들을 열전에 올린 것도 웃기기 그지 없다. 그래도 장헌공 서희가 강동 6주를 얻은 담대한 외교가 있었으니 실로 다행이며 최승로니 김심언인지 하는 자는 장위공 서희에 미치지도 못할 것이다. 성종은 단지 이를 신임한 것뿐이다. 또한 성종은 거란이 군사를 일으켜 고려를 치려할때 유가의 사상에서도 인정받는 손무자와 오자서의 울료자의 사상을 본받지 않았는지 어찌하여 과거에서 무예에 능한 자를 전 지역에 모아 이들을 가려뽑는 무과와 무경을 넣치 않았는지 정말이지 의문스럽기 그지없다. 울료자는 "그러나 지금 군왕은 위엄을 세우며 적에 대항할 의도로 서로 다투는 까닭에 전쟁을 그칠 도리가 없다. 전쟁은 무력을 줄기, 문략을 뿌리로 삼는다. 무력이 겉이라면, 문략은 속에 해당한다. 문무의 관계를 꿰면 승부의 큰 줄기를 장악할 수 있다. "라고 했다. 비록 문략을 쌓은 고려이고 뿌리만 있고 그 뿌리를 서희의 담판외교로 장위공 서희가 세웠으나 줄기는 엉망이고 부서지기 직전이었다. 김치양의 난을 비롯해 강조의 난을 김훈 최질의 난이 그러했다. 정국을 수습하긴 커녕 오히려 정국이 혼탁하기가 하늘을 찔렀으며 뿌리가 깊음은 물론 줄기까지도 있던 인헌공 강감찬이 귀주에서 승리로 간신히 이를 막은 것뿐이다.  단지 지방관을 파견하며 성씨간 결혼 같은 문란한 풍숙을 상당부분 없애려고 한 것은 그나마 치척으로 보인다.











고려 광종에 대한 논평과 나의 평 역사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노비(奴婢)를 안검(按檢)하여 옳고 그름을 살펴 밝히게 하니, 종들이 대부분 주인을 배반하고 상전을 능멸하는 풍조가 이로 말미암아 크게 유행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탄식하고 원망하므로 왕비(王妃)가 간절히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비(妃)는 태조의 딸이다

[나의 평]
본시 무릇 신하와 백성 중 한 사람을 왕비로 삼는 것은 백성과 어울리며 신하와 어울리는 것이거늘 어찌하여 광종은 이를 받아들였는지 의문이 들 정도이다. 무경에선 본시 호족들이 국란을 일쌈는 자이나 국란을 행할 세력이 없는 세력과 손을 잡아야 하는데 발해의 유민이 그러하고 발해의 왕이 그러하다. 경우에 따라선 신라의 왕과 신라의 신하들이 좋으나 장휘공 서희께선 우리나라는 신라가 아닌 고구려를 계승하며 나라의 이름도 고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마땅히 발해의 유민들에게 성씨를 주고 발해의 왕족들 중 여식을 아내로 삼는 것이 좋으나 어찌하여 이러지 않았을까? 어찌하여 국란을 일쌈는 호족들과 손을 잡아 가계를 이렇게 문란하게 만드는지 모를 지경이다. 고려의 태조가 국란에 빠트릴 호족들의 여식들과 수 없이 결혼하여 위기인 것은 사실일 것이고 더욱이 왕비였던 대목왕후는 호족들 중에서 가장 세력이 크고 오히려 국란에 빠트릴 호족으로 가장 견제해야할 세력이거늘 어찌하여 가장 견제해야할 세력과 결혼했는지 의문이 든다. 뿐만 아니라  《좌전()》에 이르기를, ‘남녀가 성이 같으면 태어나는 자손이 번성하지 못하다.’ 하였으니, 광종도 광종이나 대목왕후는 애시당초 비가 될 아녀자가 아니였기에 남매의 그 애정의 괴이함의 도가 지나치기에 여동생의 행동에 괴이함을 넘어 한심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삼한의 새 주인인 고려 태조가 남긴 안좋은 것들을 이토록 많이 남겨 이런 일을 만들게 했다. 또한 노비를 안검하여 옳고 그름을 살펴 밝히게 한다는 것은 본시 노비는 반역을 저질렀거나 범죄를 저지르면 대대손손 노비가 되는게 노비이나 저때의 노비는 후삼국의 혼란 속에 범죄를 따질 법도가 붕괴되고, 반역을 처벌할 법도가 붕괴되어 본시 양인과 신하였다가 노비가 된 자들이 허다했고 이들을 잡은 자들은 비록 무능하나 진성여왕이 스스로 물러날대는 "도적"이라고 했던 자들이었다. 헌데도 그 근성을 시대가 바뀜에도 버리지 못해 저러하니 혜종과 정종이 요절하고 왕규가 난을 일으키는데 막대한 책임이 큰 자들이고 경순왕과 견훤을 배신하여 고려에 붙었음에도 전답과 노비를 차지할 자격조차도 없는 자들이거늘 어찌하여 노비를 차지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고 그 노비와 처지와 비슷한 자들이 노비를 삼으니 실로 웃기기 그지 없다.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유금필을 유배보는 것도 본시 저들임에도 뻔뻔함이 이토록 심하고 이들이 골품을 비난하나 3족을 멸해 죽여야할 난신적자들이 골품을 대신해 독식하고 있으니 골품을 따질 자격은 하나도 없다. 원망할 자격하나 없으며 탄식할 자격 없으며 물러나야 한다.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하다 하였는데, 그 비천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은 저 대목왕후일 것이다. 이후 대목왕후와 같은 일가인 헌애왕후가 대목왕후의 온갖 더러운 짓거리를 엄청나게 일쌈으니 거란에게 큰 위기를 빠진 것이다. 공자와 맹자께선 저러한 난신적자들을 가마솥에 넣어 죽여라 하였으니 그 탄식하고 원망하는 왕비와 신하라는 자들은 본시 그런 자들과 그런 자들의 여식일 뿐이고  무경의 삼략에선 "막강한 문벌인 강종(强宗)이 자신들의 세력만 믿고 간사한 짓을 자행하고, 관작이 없는데도 존귀한 대접을 받고, 막강한 위세를 떨친 나머지 두려워하며 떨지 않는 자가 없고, 무리의 수가 많아 마치 칡덩굴처럼 얽혀 있고, 작은 덕과 은혜로 사사로이 덕망을 쌓고, 음모를 꾸며 자리와 이권을 빼앗고, 서민을 업신여기며 멋대로 침탈한다. 국내가 크게 시끄러운데도 관원들은 그 세력을 두려워해 덮어두며 말하지 않는다. 이를 일컬어 난리가 나는 근본인 난근(亂根)이라 한다."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그들이 바로 노비가 아닌 백성들을 본시 본래의 자리로 살펴 돌아가도록 반대하는 자들이었다. 주인을 배반한 것이 아닌 본시 도적을 떠나 양인이 된 것이니, 물러날때 물러나야 할 자들이 어째서 나라의 요직을 독차지 했는지 의문이고 황보가문은 물론이고 후백제와 신라에 신하였던 자들은 더 그럴 자격이 없다. 오히려 난신적자임에도 피를 숟하게 뿌려대며 죽어야 할 자이거늘 벼슬아치를 탐하고 왕실과 신하들 백성들 모두에게 고통을 주고 온갖 문란한 행위를 하니 고려인지 이들의 나라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한림학사() 쌍기()에게 지공거()를 명하고, 시()·부()·송() 및 시무책()으로써 시험을 보여 진사()를 뽑게 하였다. 왕이 위봉루()에 나아가 방()을 내어 걸었는데, 갑과()에는 최섬() 등 2인, 명경()에 3인, 복업()에 2인이 급제()하였다. 쌍기의 건의()를 처음 채택하여 과거()를 설치하였으니, 이로부터 문풍()이 곧 흥기() 되었다.

○후주()에서 상서 수부 원외랑() 한언경()과 상연봉어() 김언영()을 보내어 비단 수천 필을 가지고 와서 동()을 무역(貿)해 갔다.



[나의 평]

과거는 본시 민본에 다가서는 제도이자 나라의 백성들중 가장 학문이 으뜸인 자를 뽑은 제도로 수문제의 치세와 당나라는 비록 아녀자로 부끄러운 덕도 많으나 이를 통해 치세를 과장을 갈고 닦은 무왕후가 있으며 이를 완성한 것은 당 현종일 것이다. 마침내 이러한 것이 고려에 도입됨으로 저 권신을 상징하는 호족과 귀족의 국란은 잠들고, 무경이 말하는 군자와 명군, 현자와 군주를 이룰 길을 바야므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문덕의 치세를 높였으나 무예는 물론 무경을 겸비한 무덕을 갖춘 자들을 전 지역에서 모아 무를 아는 관료로 뽑지 않으니 실로 한탄스럽기만 하다. 제 아무리 무과로 인하여 절도사가 난립하여 그 절도사들이 나라를 혼란으로 빠트렸으나 이후 김치양이라는 자가 반란을 일으켰고, 강조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그들은 과거 출신이 아니였고, 무과가 없기 때문에 무관도 아니였을 것이다. 또한 본시 고려는 그 이전 후삼국의 혼란 속에서 무예에 뛰어난 자들이 꽤 많으나 이들이 병졸만 되니 안타깝기 그지 없다. 귀족들과 호족들이 자기 마음대로 벼슬아치를 독식하기 위해 저 과거가 실시되고 그들이 잠드나 정작 정작 공자와 맹자의 문덕만 있지 손무와 오기의 무덕은 없고 그들 모두를 버리지 말아야 하거늘 비록 장헌공 서희와 같은 훌륭한 인물이 나왔으나 이후 거란과의 전쟁에서 이리도 참담한 상황을 만들 수 밖에 없을 것이며, 강조의 변과 김훈과 최질의 변을 당하는 것이다. 쌍기의 생각이 더 크게 미치지 못하였고 광종의 생각이 더 크게 미치지 못한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학문의 치세는 높였으나 문을 높였을뿐 무를 높이지 못하였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홍화사()·유암사()·삼귀사() 등의 절을 창건하였다. 중 혜거()를 국사()로 삼고, 탄문()을 왕사()로 삼았다. 왕이 참소함을 믿고 사람을 많이 죽였으므로, 의심과 두려움을 마음속에 품고 죄악을 소멸하려 하여 널리 재회()를 베푸니, 무뢰배들이 거짓으로 출가()하여 배불리 먹기를 구하고 구걸하는 자가 모여들어서 심지어 간혹 떡이나 쌀·콩·땔나무·숯을 서울이나 지방의 도로에 시여()함이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으며, 방생소()를 벌여 놓는가 하면, 가까운 절에 나아가 불경()을 개연()하였다. 도살()을 금단()하여 심지어 궁내의 반찬까지도 또한 저자의 가게에서 사다가 올렸다.


[신()등은 살펴보건대,]
“옛날의 성제()나 명왕()은 반드시 삼공()으로써 태사()를 삼았으니, 스승이란 도()를 교훈함에 있어 오직 그 사람 뿐이어서입니다. 이 때문에 탕()은 이윤()을 스승으로 삼고, 무정()은 부열()을 스승으로 삼았으며, 무왕()은 상보()를 스승으로 삼았으니, 이른바 스승이란 도를 존양()한 위치여서 이와 같은 것입니다. 호진()의 요흥()이 처음으로 번승()인 구마라습()을 스승으로 삼아 무릎을 꿇고 엉금엉금 기며 종처럼 삭발한 중을 섬겨 스승으로 삼는 것이 모두 변방 오랑캐였으니, 황당하게 홀리는 가르침으로 화를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요흥은 본래 이적()의 임금으로 여러 말로 책망할 것도 없지만, 어찌하여 태조는 처음에 호진의 실패한 전철을 답습하였고, 광종()은 또 태조의 잘못된 과거를 본받아 중들을 숭배해 받들어서 혹은 국사()로 삼고 혹은 왕사()로 삼는단 말입니까? 그 국사라고 말함은 온 나라가 그를 스승으로 삼는 것이고, 왕사로 말함은 천승()의 임금이 굽혀서 그를 스승으로 삼는 것인데, 소위 스승이란 무슨 도를 스승으로 하는 것입니까? 무부 무군()의 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뿐입니다. 한 나라의 큰 영토를 가진 천승()의 존귀한 몸으로 그 무부 무군의 도를 스승으로 삼는다면 어찌 서로 뒤따라 이적()이나 금수()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로부터 그 이후로 자손이 서로 이어 대대로 가법()을 삼아서 하나라도 머리를 깎고 중의 행색을 하는 자가 있으면 모두 그를 존경하여 왕사나 국사로 삼고, 그를 받들기를 오히려 혹시라도 (남에게) 뒤질까 두려워하다가 점차 편조(, 신돈())의 화를 초래하게 되어 나라가 따라서 망하게 되었으니 아! 슬픈 일입니다.”


[나의 평]
홍화사(弘化寺)·유암사(遊巖寺)·삼귀사(三歸寺) 등의 절을 창건하였다라고 하니 황룡사에 거대한 탑과 첨성대와 같은 것과 온갖 사찰이 있음에도 계속해서 계속된 절간의 창건은 그 도가 심히 지나치다할수 있다 불자라면 이런 상황에서 절을 창건하기보다 기존의 절을 지키는 것에 만족해야하거늘 옛날에 문무왕은 절간에 토지를 주는 것을 금하였으니 문무왕을 옛왕이라고 무시하지 말고 잘했던 것도 본받아야 할것이다. 과거를 통해 전국의 인재중 가장 출중한 자를 뽑고, 학식이 높은 사람들을 뽑을 위엄을 달성하고 노비된자 양인으로 돌리나 고려가 미침네 고려의 모습을 보이나 이러한 모습들로 그 이상을 뻗치지 못하였으니 안타깝기 그지 없다.

[이제현()이 찬()하기를,]
“광종()이 쌍기()를 등용한 것을 ‘현인()을 뽑아 씀에 한계를 두지 않은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쌍기가 과연 어질었다면, 어찌 임금을 착한 데로 인도하여 참소를 믿고 형벌을 함부로 시행하는 데에까지 이르지 않도록 못하였단 말인가? 그 과거()를 설치하여 선비를 뽑은 것과 같은 경우는 광종()의 우아함으로 문()을 써서 풍속을 교화시키려는 뜻이 있음을 볼 수 있으며, 쌍기 또한 순종해 받들어 그 아름다움을 이루었으니, 도움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오직 그가 부화()한 글을 주창하였으므로 후세에 그 폐단을 막을 수 없었다.” 하였다.


[동국통감의 평]

광종(光宗)은 총명하게 듣고 결단하여 비로소 더불어 큰 일을 할 만하였으나, 의심하고 괴퍅(怪愎)함이 날로 심하여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들이 뜻을 얻어 골육(骨肉)의 가까운 사람들을 죽이고 장상(將相)들을 도륙하매,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떠나 나라의 근본을 잃을 뻔하였으니, 비록 문아(文雅)의 아름다움이 있다 하나, 칭찬할 만한 것이 못됩니다.


[나의 평]

참소를 믿고 형벌을 함부로 시행하는 데에까지 이르지 않도록이네 의심하고 괴팍함이라는 말을 하나 호족들이 숱하게 국란을 일으켜 왕의 수명을 갉아먹기에 이르렀는데 어느 누가 의심을 하지 않을까? 의심하고 괴팍함은 국란을 일으킨 호족들이며 몇년간의 인내를 왕이 함에도 고마워하고 은덕에 보답하긴 커녕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했으니 이들의 의심과 괴팍함과 간사함만할까? 무경에선 호족의 국란을 숱하게 말하였으니 풍속의 교화로 인해 뜻하지않은 사람들이 죽었을 것이다.의심하고 괴팍함이 날로 심하여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들이 뜻을 얻음은 본시 호족들이었으며 그로 인해 도륙된 그 골육과 장상들이었고 이들에게 칭찬할 것은 단 한개도 없을 것이다. 나라의 근본을 뒤흔든 사람은 고려의 태조이며 비록 통일은 했으나 무경 삼략에 경계할 국란을 일으킬 호족들을 받아들이니. 이 책임은 광종에게 물을 것이 아닌 고려 태조에게 있을 것이다. 앞전 왕이 불과 안타깝게 2년, 4년할 정도로 호족들은 국란은 엄청났다. 또한 훈요십조 8항에서 차현이남을 운운하나 정작 본인은 외가를 나주로 두는 혜종과 나라를 두번 배신한 후백제 출신의 신하인 박영규를 받아들였으니 과연 태조가 태조다웠는지 의문이 들 지경이다. 이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은 고려 태조에게 있을뿐 고려를 진정으로 세운 것은 광종일 것이다. 고려 태조의 계책이 유가와 무경의 계책보단 종횡의 계책으로 성과를 거두니 비록 광개토왕, 문무왕, 근초고왕과 비견되나 그 이상을 넘지 못할 것이며 고려 광종 또한 신문왕보다 나아가도 한발만 나아갔을 뿐이다. 또한 호족들을 저렇게 숙청하면 토지는 텅 비거늘 그 토지를 정비한 전시과가 경종때 정비가 되니 후삼국이 이토록 고려에게 큰 고통을 줬음을 알고 통일을 하면 기세를 낮추어야 하거늘 어찌 고려 태조와 호족들은 고려에 과반의 업적을 세우나 고려가 통일한 이래에 과오만 쌓으니 2대왕에선 두왕의 무능함과 호족들의 국란으로 끝났다고 볼수 있으면 호족이길 포기하고 2대왕은 이들을 제어해야 하거늘 그러지 못하였기에 과반의 업적을 당성해 진정한 고려를 탄생시켰으나 또 과반의 과오를 만들 수 밖에 없었다. 고려 태조가 광종이 되어야 하나 고려의 태조가 광종이되었다. 이로 인해 이후 왕들은 명군이 나오고 혼군이 나오고 번갈아 나오며. 무수히 많은 기회를 놓치고 오히려 무수히 많은 기회에도 기회를 얻기에 급급하고 기회를 놓치니 실로 안타깝고도 한심하다. 후삼국에 종횡을 꺽어 종식시켜 기세를 올린 나라가 그 옛날 수나라가 되지 않는 것은 결과적으로 광종과 쌍기에 공이 있을뿐이며, 전 왕조에는 이미 망했던 것을 다시 구하느라 노력을 했으나 그 노력이 한계에 달했을 뿐이다. 방도를 잃어 군사를 일으켜 대국을 치는 무모함을 접으니 수나라가 되지 않은 것이다. 광종같은 왕이 앞선 왕보다 더 왕이 되어야 하고 쌍기같은 자가 빨리 나왔어도 고려는 이후 사태의 심각성이 숱하게 터짐에도 이제서야 수습하는 모습을 맞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부교 사건에 대한 논평과 나의 논평 역사

○거란[契丹]이 사신을 보내어 낙타[橐駝] 50필을 가지고 돌아왔다. 왕은, ‘글안이 일찍이 발해(渤海)와 더불어 연합해서 화목하게 지내다가 갑자기 딴 마음을 품어 옛 맹약(盟約)은 돌보지 않고 하루 아침에 멸망시켜 버려버렸으니, 이렇게 무도함이 심하여 멀리 결탁해서 이웃을 삼을 수 없다.’ 하고, 그 교빙(交聘)을 끊었다. 그들의 사신 30인은 섬으로 귀양보냈고, 낙타는 만부교(萬夫橋) 아래에 매어 두어 모두 굶어 죽게 하였다.

[이제현(李齊賢)이 말하기를,]
“충선왕(忠宣王)이 일찍이 신 이제현에게 묻기를, ‘우리 태조 때에 거란이 보내온 낙타를 다리 아래에 매어 놓고 꼴이나 콩을 주지 않아 굶어 죽게 하였기 때문에 그 다리 이름을 「낙타교」라 하였다. 낙타가 비록 중국(中國)에서 생산되지 않지만 중국에서도 일찍이 낙타를 기르지 않은 것이 아니다. 나라의 임금으로서 수 십 마리의 낙타를 가지고 있더라도 그 피해가 백성을 해치는 데에는 이르지 않을 것이며, 또 이를 물리치면 그만이지 어찌하여 굶겨서 죽이기까지 하였을까?’ 하므로, (신이) 대답하기를, ‘창업(創業)하여 왕통을 전하여 주는 임금은 그 보는 것이 멀고 생각하는 것이 깊어서, 후세 사람으로는 따를 수가 없습니다. 또 송(宋)나라 태조(太祖) 같은 이는 궁중에서 돼지를 길렀는데, 인종(仁宗)이 놓아주게 하였으므로 뒤에 요인(妖人)을 얻는 데에는 도리어 피를 취할 곳이 없었으니, (송나라) 태조의 생각이 또한 이에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이 또한 정설(定說)은 되지 못합니다. (송나라) 태조가 돼지를 기르게 한 뜻이 피를 취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있지 않았는지 어찌 알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 태조께서 이렇게 한 까닭은 장차 오랑캐의 간사한 계책을 꺾으려 함이었는지, 아니면 또 후세의 사치스런 마음을 막으려는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대개 은미한 뜻이 있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는 전하께서 공손히 마음속으로 생각하여 힘써 실천해 체득하는 가운데에 있을 뿐이며, 어리석은 신하로서 감히 경솔하게 의논할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신(臣)등은 살펴보건대,]
“이제현(李齊賢)이 거란[契丹]을 대우한 방도에 대해 논하기를, ‘왕가도(王可道)가 화친(和親)을 끊자고 건의한 것은, 황보유의(皇甫兪義)가 우호를 지속하여 백성을 안식(安息)시키자고 한 주장만 같지 못합니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충선왕의 물음에 대답한 것은 다만 낙타 만을 논하였고, 태조가 화친을 끊은 실수는 말하지 않았으니 어찌 된 것입니까? 전사(前史)에는 화친을 끊은 것으로써 태조의 성덕(盛德)의 일로 삼아 찬양하였는데, 신은 마음속으로 의심이 갑니다. 대체로 보아 이웃 나라와 사귀고 먼 곳의 사람을 회유(懷柔)하며, 국경을 공고히 하고 사명(使命)에 신중을 기함은 곧 만세토록 나라를 보호하는 훌륭한 계책입니다. 지금 고려 태조는 신라를 항복 받고 후백제를 멸하여 겨우 삼한(三韓)을 통일하게 되어서 흩어진 자가 다 모이지 못하고 부상자는 다 일어나지 못하였으며, 제도나 경영을 처음 시작하느라 겨를이 없으니, 정작 강성한 이웃 나라와 화합하여 장원한 생각을 가지고 뒤돌아볼 때입니다. 거란은 대대로 유(幽)·연(燕)·요(遼)·계(薊)의 땅을 점거하여 나라와 군사가 부강해 지자, 중원(中原)의 혼란을 엿보아서 모조리 빼앗아 전부 차지하려는 뜻을 가지고 한창 사나운 기세를 펼치는 발해(渤海)를 마치 마른 나무 꺾듯이 쉽게 차지하였으니, 그들이 새로 창립한 고려를 보고서 어떠한 것으로 알았겠습니까? 그러나 오히려 우리에게 먼저 교빙(交聘)을 맺으려고 하였으니, 노려보는 불측한 마음이 없는지 어찌 알았겠습니까? 그들이 보내 온 사신을 예로써 대우하고 정성으로써 접대함으로 인하여 동맹의 우호를 성실히 맺는 것이 어찌 나라를 보호하는 좋은 계책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태조의 생각이 이에 미치지 못하였으니,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거란이 발해에게 신의를 잃은 것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기에 발해를 위한 보복으로 그 사신을 거절하여 심하게는 바다의 섬으로 귀양보내고, 그 낙타를 물리쳐 심지어 굶겨 죽게까지 하였으니, 이는 다만 거절하는 데 그쳤을 뿐 아니라 거절하기를 원수와 같이한 것으로, 그들이 우리에게 원수로 갚을 것은 괴이할 만한 것이 못되었습니다. 이로부터 변경(邊境)에 흔단이 날로 깊어져서 정종(定宗) 때에는 광군사(光軍司)를 두어 변경의 방비로 삼았으니, 그 화는 이미 시작이 된 것이었습니다. 성종(成宗) 때에 이르러서는 소손녕(蕭遜寧)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침입하여 땅을 차지하려고 항복을 요구하므로 화친을 청하였으나 그 전화는 이미 요원(燎原)의 불길처럼 번져 갔습니다. 현종(顯宗) 때에 이르러서는 글안의 임금이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적(賊)을 토벌한다 말하면서, 실은 우리나라를 침략하여 빼앗으려는 목적으로 숙주(肅州)를 무너뜨리고 서경(西京)을 격파하여 승리의 여세를 타고 몰아쳐 들어오므로, 도성을 보존할 수가 없어서 임금의 수레를 남쪽으로 옮겼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았음이 실낱 같았으며, 그 화가 이미 하늘에 치달았습니다. 급기야 사신을 보내 강화(講和)하여 신하라 칭하고 정성을 바쳐 복종하게 되자, 변경(邊境)을 걱정하지 않고 백여 년을 지냈습니다. 고종(高宗) 때에 내려와서는 그 유종(遺種)인 금산(金山)·금시(金始)와 같은 자들이 잔당(殘黨)을 취합(聚合)하여 하삭(河朔)의 백성들을 협박해 몰고와 압록강을 건너서 산성과 진영을 함락시키어 환란이 몹시 심각하였으나, 군사를 부지런히 동원하여 두어 해가 지난 뒤에야 능히 소탕하여 화란(禍亂)을 비로소 종식시킬 수 있었습니다. 만약 거란이 금병(金兵)으로 인해 망해지지 않고 몽고(蒙古)로 인하여 섬멸되었다면, 고려의 존망 성패(存亡成敗)는 또한 예측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연유를 추구하여 보면 모두 고려 태조가 강성한 도둑을 대처하는 데에 그 방도를 잃고, 화친을 무시해 끊은 소치로 그런 것이니, 후손에게 물려 줄 계책의 실수를 이루 다 한탄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논평]

이제현은 흡사 고려 태조가 만부교사건을 일으켜도 일으키지 않아도 거란이 쳐들어온다고 하며 아녀자만도 못하게 대답을 전혀 못하는 것을 보니 무늬만 성현이고 석학이네 하는 사내이나 마음은 아녀자만도 못할뿐이다. 당조(조선조)의 논평이 옳다고 할수가 있다. 당조의 논평은 장위공 서희를 믿고 만부교 사건을 질타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보여진다. 당조의 논평에 더 찬동하여 덧붙인다면 본시 고려는 중원은 공자와 맹자와 손무자와 오자서의 말을 어긴 댓가를 몇세기전에 댓가를 치루었으며 거란은 기세등등하나 중원의 옛 기세는 남아 있을 것이고 무경에서 말하는 호족의 기세가 남을 것이다. 왜국은 옛 삼한을 교란시키며 이득을 얻으나 잠잠하여 조용하니 이토록 좋은 기회는 없었을 것이며 기세 역시 남다를 것이다. 더욱이 대국인 발해의 왕자가 투항을 하며 기세는 한없이 높을 것이니 그 기세에 따라 만부교사건을 일으켰을 것이다. 모든 나라가 다 기회를 얻은 셈이 된다. 그러나 오랑캐였던 거란이 오히려 화친을 청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며 낙타를 주어 기세를 꺽어 고려와 화친을 청하기 이르렀으니 거란이 그나마 공자와 맹자와 손무자와 오자서와 순자와 같은 옛 성현들의 뜻에 따르던 나라였을 것이다. 고려가 금수의 나라라고 할 진정한 나라는 옛 성현이 나온 나라임에도 이를 크게 어기며 벌하고 옛 성현을 스스로나 우리가 되찾게 할 중원이며 신라와 백제 사이에 국란을 만들고 종횡을 크게 만들어 흔단을 크게 만들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왜국이며 또한 발해의 멸망을 틈타 나라를 세운 여진을 금수의 나라로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특히 왜구와 여진은 이웃나라에 종횡을 반복하여 국란을 만들고 자신도 저울질하고 남을 저울질할 정도로 어지러운 존재들이나 기세를 단박에 죽이지 않으면 더 강해지고, 기세를 단박에 죽이면 더 약해질 나라이다. 더욱이 신라 역시 천년 사직을 유지하며 왜구들에게 가장 숱하게 시달렸던 나라이고, 경순왕 계열이었던 서라벌 귀족들은 왜구라면 아주 이를 갈것이며 3최로 대표되는 유학자들은 일찍이 왜구를 오랑캐로 표현했으니 이들의 입장은 한치도 생각하는지 의문이다. 그로 인해 혜종,정종,광종 3대왕에선 연호가 자리잡지 못해 2왕의 재위는 2년 4년이 되며 광종의 연호는 바뀌고 바뀌어서 독자의 연호를 썼으나 이 과정에서 왕권의 흔들림은 심하고 제도의 정비를 하나 하나 할때마다 왕의 힘이 급작스럽게 막강해져 결국 수 많은 신하들이 죽었던 것이다. 중원의 경우는 혼란이 모두 사라져 통일을 할때는 그때서야 거란을 금수로 표현하며 중원을 제도를 따르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중원을 이야기할가한다. 일찍이 중원이 저리된 이유는 당이 안사의 난 이후 지금까지 무경에서는 “군주는 높이 임해 두루 살펴보고, 신하는 안심하고 아래서 보필합니다. 군주는 군림하면서 신하를 소원하게 대해서는 안 되고, 신하는 안정되게 보필하면서 숨기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군주는 은택을 두루 펴야 하고, 신하는 안정되고 진중한 자세로 직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은택을 두루 펴는 것은 하늘을 본받은 것이고, 안정되고 진중한 자세는 땅을 본받은 것입니다. 군주와 신하의 자리와 직책이 분명하면 군신의 예법은 이내 이루어지게 됩니다.”라는 무경의 말을 어겼고 중원은 이토록 혼란에 빠져산 것이다. 유가의 말도 마찬가지로 난신적자는 본시 엄벌에 처한다 하였으나 안사의 난이 되기 전에 그러했는지 의문이다. 중원이라는 나라가 이토록 한심하고 공자와 맹자 하다못해 순자와 손자를 따르는 나라인지가 의문이다.







  


 


신라 경순왕의 항복에 대한 논평들과 나의 논평 역사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신라의 박씨와 석씨는 모두 알에서 탄생하였고, 김씨는 금궤(金櫃)에 들어있는 채 하늘에서 내려왔다거나, 혹은 금거(金車)를 타고 왔다고도 하는데, 이는 더욱 괴이하여 믿을 수 없다. 그러나 대대로 전하여 온 나라의 풍습상 사실로 생각하고 있었다. 정화(政和, 송(宋)나라 휘종(徽宗)때의 연호) 연간에 우리 조정에서 상서(尙書) 이자량(李資諒)을 보내어 송(宋)나라에 조공(朝貢)할 때, 신(臣) 김부식은 문한(文翰)의 소임으로서 보행(輔行)하게 되었다. 우신관(佑神館)에 이르러 한 사당(祠堂)에서 여선(女仙)의 형상을 모셔놓은 것을 보았는데, 관반 학사(館伴學士) 왕보(王黼)가 말하기를, ‘이는 귀국(貴國)의 신(神)인데, 공(公) 등은 이를 알겠는가?’ 하고, 이어 말하기를, ‘옛날 제실(帝室)의 딸이 남편 없이 잉태(孕胎)한 일이 있었는데, 남에게 의심을 받게 되자 바다를 건너 진한(辰韓)에서 아들을 낳으니, 그가 해동(海東)의 첫임금이 되었고, 제녀(帝女)는 지선(地仙)이 되어 오래도록 선도산(仙桃山)에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그 상(像)이다.’ 하였다. 신이 또, 대송국 신사(大宋國信使) 왕양(王襄)의 동신 성모(東神聖母) 제문(祭文)에, ‘어진이를 낳아서 나라를 창건하게 하였다.’는 글귀가 있는 것을 보고서, 곧 동신(東神)은 선도산 신성(神聖)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 아들이 어느 때에 왕이 되었는가는 알 수 없었다. 이제 다만 처음에 왕이 되었던 사람에 대하여 살펴보면, 자신은 검소하고 남에게는 관대하며, 관제(官制)를 간략하게 설치하고 일을 간소하게 시행하였으며, 지성으로 중국을 섬겨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조빙(朝聘)하는 사신이 끊이지 않았고, 항상 자제(子弟)를 조정에 보내어 숙위(宿衛)하게 하고, 국학에 입학시켜 강습하게 하였다. 이에 성현의 교화를 받아, 미개하고 거칠던 풍속을 혁신하여 예의(禮義)의 나라로 만들었고, 또 당나라 군사의 위엄을 빌어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그 땅을 차지하여 군현(郡縣)을 삼았으니, 성대(盛代)라고 할 만하였다. 그러나 불법(佛法)을 받드는 것의 폐단을 알지 못하여, 마을에까지 탑묘(搭廟)가 즐비하게 들어서고, 서민들은 절간으로 도피하여 군사와 농민이 점점 줄어들게 되어, 국가가 날로 쇠퇴하게 되었으니, 어찌 혼란이 생기지 않겠으며 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때에 여인(女人)이 왕위에 올라, 음탕하고 더러운 일을 자행(恣行)하고, 총애 받는 자가 권세를 부려, 여러 도적이 한꺼번에 일어나기에 이르렀다. 경애왕(景哀王)은 황음 무도(荒淫無度)하여, 궁인(宮人)들과 측근 신하들을 데리고, 포석정(鮑石亭)에 나아가 놀면서 술자리를 벌려 놓고 취하여, 견훤의 군사가 갑자기 오는 줄도 깨닫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릇 ‘문 밖의 한금호(韓擒虎)1), 누대(樓臺) 위의 장여화(張麗華)2)’나 다름이 없었다. 경순왕(敬順王)이 태조(太祖)에게 귀순한 것은, 비록 마지못하여 한 일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가상하다 하겠다. 그때 만약 천명(天命)을 모르고 목숨을 걸고 힘껏 싸워, 태조의 군사에 항거하다가 힘이 꺾이고 형세가 궁해졌다면, 반드시 그 종족(宗族)이 멸망되고 그 해가 무고한 백성에게까지 미쳤을 것인데, 이에 부고(府庫)를 봉(封)하고 군현(郡縣)을 기록하여 (태조에게) 바쳤으니, 그의 조정에 대한 공과 백성에 대한 덕이 매우 크다. 옛날 전씨(錢氏)3)가 오월(吳越)의 땅을 송(宋)나라에 바치고 귀순한 데 대하여, 소자첨(蘇子瞻)이 그를 충신이라 하였는데, 지금 신라의 공덕은 오월보다 훨씬 나은 것이다. 우리 태조는 비·빈(妃嬪)이 많아 그 자손 역시 번성하였는데도, 현종(顯宗)이 신라의 외손(外孫)으로서 보위(寶位)에 올랐거니와, 그 후로 대통을 이은 이도 모두 그 자손이었으니, 어찌 음덕의 보답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이제현(李齊賢)이 말하기를,]
“김부식(金富軾)이 논(論)하기를, ‘우리 태조는 비·빈(妃嬪)이 많아 자손이 번성하였는데도, 현종이 신라의 외손으로서 즉위(卽位)하였고, 그 후 대통을 이은 이도 모두 그의 자손이니, 어찌 음덕의 보답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였고, 김관의(金寬毅)·임경숙(任景肅)·민지(閔漬) 세 사람의 글에는 모두, ‘대량원부인 이씨(大良院夫人李氏)가 태위(太尉) 정언(正言)의 딸로서 안왕(安王)을 낳았다.’ 고 하였으니,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였다.

[신(臣)등은 살펴보건대,]
“김부식은 김부(金傅)가 전씨(錢氏)에 비하여 공덕(功德)이 훨씬 낫다고 하였는데, 무엇을 보고서 그런 것입니까? 오월(吳越)은 송나라에 대하여 번신(藩臣)의 직무를 수행하며 받들어 군신(君臣)의 구분이 정하여져 있으나, 신라는 고려에 대하여 이와 같지 않았습니다. 대개 태봉(泰封)은 신라의 반적(叛賊)이요, 고려 태조는 태봉의 신하였으니, 비록 태봉이 무너지고 고려의 운수가 날로 번창한다고 하나, 신라는 고려에 대하여 일찍이 무릎을 굽혀 번신이라 일컬은 적이 없었는데, 하루아침에 종묘사직을 버리고 땅을 바치면서 북면(北面)하여 조회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전씨(錢氏)는 전류(錢鏐) 때부터 황소(黃巢)의 난을 기화로 비로소 오월에 웅거하면서 대를 이어오다가, 오계(五季)를 지나 송나라 태종(太宗) 때에 이르러서 13주(州)를 바치고, 그대로 머물러 숙위(宿衛)하였으니, 누대(累代)를 번신으로 지내다가 하루아침에 순리에 따라 토지를 바친 것이므로, 이는 제후(諸侯)가 몸을 굽히고 (자신을) 욕되게 한 것에 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김부(金傅)는 비록 역적 견훤이 왕위에 세워 주었기 때문에, 쇠미(衰微)하여 떨치지는 못하였으나, 신라는 세 성(姓)이 서로 왕위를 이어 거의 1천 년이 지났으니, 그 깊은 인애(仁愛)와 후한 은택으로 충분히 인심을 굳게 단결시킬 수도 있었을 텐데, 신하나 백성이 어찌 스스로 안정하고 스스로 정성을 바치기를 삼인(三仁, 미자(微子)·기자(箕子)·비간(比干))과 같이 하고, 선왕(先王)의 은택을 생각하여 잊지 않기를, 은(殷)나라의 백성과 같이한 자가 없었겠습니까? 더구나 왕자(王子)가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을 논하여 반복해서 간절히 간하였는데도, 어찌하여 경순왕은 효자가 간하는 것까지 뿌리치고, 1천 년 조종(祖宗)의 소중한 기물[重器]과 수천 리 영토를, 머리를 조아리며 두 손을 모아 공손하게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단 말입니까? 경순왕이 고려에 대하여 미약해서 힘을 쓸 수 없고, 위태하여 스스로 보존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선을 행하여 스스로 강해지면서 천시(天時)를 기다리는 것이 옳을 것이며, 만약 어쩔 수 없는 형편이라면, 살아 남은 무리를 규합하여 성(城)을 등지고 사직(社稷)을 위하여 한 번 죽기를 각오하는 것이 옳았을 터인데, 도리어 살펴 깨닫지 못하고 자신이 항복한 포로가 되어, 북면(北面)하고 신하라 칭하며, 고려의 궁궐 뜰에서 포복 진퇴(匍匐進退)하였으니, 그가 진(晉)나라 민제(愍帝)4)나 오(吳)나라 손호(孫皓)5)와, 다를 것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뒤에 비록 부귀를 누리고 권세가 대단했으며 외손이 번성했다고 한들, 어찌 능히 나라를 망하게 하고 자신을 잃은 큰 수치를 씻을 수 있겠습니까? 경순왕과 같은 사람은 큰 절의를 이미 잃었으니 나머지는 본받을 것도 없는데, 김부식이, ‘전(錢)씨와 대등하다’ 한 것은, 도대체 무엇을 보아서 그렇다는 것입니까?”

[나의 평]
문에 밝은 자들의 의견이 이토록 다르니 그야말로 중구난방을 이루듯한 평론이다 한쪽에선 항복을 가상하다고 하며 부귀를 누렸다하나 한쪽에선 부귀를 누리지 않았다고 하며 이씨라고 하며 오나라의 손호와 촉나라의 유선과 비교하니 실로 한심하고 또 한심스럽다. 고려조와 당시조(조선조) 문신이라는 굴직한 자들의 사려와 지혜깊음이 이토록 이해득실을 살피는게 떨어지고 또 떨어지니 어찌 문략이 높다고 하겠는가. 무경에 울료자께서는 "문략은 이해득실을 살피며 나라의 안위를 판별하는 기준이다"라고 했는데, 이해득실을 살피긴 커녕 한쪽은 뽐내고 한쪽은 이해득실없이 성씨를 논하며 한쪽은 이해득실도 못따지고 오로지 태자의 편에 들며 몇백년전 천년 신라를 잃었다고 한탄만할뿐이다. 흡사 유가를 따르며 종횡가를 따르고 유가를 따르며 묵가를 따르며 유가를 따르며 불자를 따르던 자들의 행태와 어찌 이리도 똑같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일단 이제현의 말에 반론하자면 불자가 쓴 유사에서는 “이 밖에 25비주(妃主) 중에 김씨의 일은 실려 있지 않으니 자세하지 않다. 그러나 사신(史臣)의 논(論)에 또한 안종을 신라의 외손이라고 했으니 마땅히 사전(史傳)이 옳다고 하겠다" 라고 했으니 이것이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신라의 외손이 생각만큼 번창하지 못하였는데, 김부식의 말도 틀린게 있다면 당장에 경순왕의 후예들이 번창한 것은 김부식이 번창하던 때로 이는 대성왕 광종때는 무경에 나오는 그 호족들이 국난을 일으켜 그들 일가도 억울하게 엮여 안타까운 변을 당하여 세력을 크게 잃었을터 어찌 번창했다고 하는가? 뿐만 아니라  당시조(조선조) 문신들의 한탄은 이해득실도 못따져 이러한 사관을 남기며 명에 웃음거리를 당할까봐 이 동국통감을 어찌 쓸까하는건 성종조 실록에 나올 지경으로 문이라면서 이해득실이 이토록 떨어지 어찌 유가의 문덕을 이야기 하는지 의문이 든다. 공자께선 배움에는 끝이 없다하였거늘 과거를 통해 올라와서 배움에 끝을 잃어서인지 이토록 졸렬한 글을 남기는지 의문이 든다. 신라에는 화백회의가 있었는데, 반대가 있으면 찬동하는 자 많았다. 즉 경순왕의 항복에 찬동하는자 많았음에도 어찌 경순왕 혼자만의 잘못일까? 옛날에 한의 마지막 왕 헌왕은 위나라에 고립되어 그를 따르는 자들이 선주가 지배한 촉나라에 있었을뿐 위에 갇혀지내던 신세가 되었고, 미침내 한왕조의 사직을 내려놓았다. 한편으론 실로 불행하고도 불행한 왕이라고 하고, 그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신라 역사상 가장 불행하고도 또한 때를 잘못만난 왕으로 이는 백제의 아신왕과 고구려의 영류왕과 비슷할 것이다.

견훤과 같은 찬탈자 속에 세워지나 다행히 그 옛날 광개토왕,근초고왕,문무왕을 닮은 고려 태조와 같은 사람이 나와 다행이도 그와 같은 고려 태조에게 줘 백성들을 비롯해 그 거대한 발해의 왕자였던 대광현까지 투항하며 삼한의 새로운 사직을 시작하였고 기대를 한몸에 얻었고 고려는 물론 당시조(조선)에서 신라는 이미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지 몇백년전 망한 나라에 항복을 하지말라는 것이 참으로 괴이하다, 김부식이 신라의 세계를 논할때 800년대를 이미 몰락기로 보며 신라 왕들의 찬탈을 한없이 부끄러워 했으며 종횡이 난무하다 못해 김헌창의 난이 터짐으로 다시는 혜공왕 이전의 치세는 없어졌으며 이것은 간주리의 난과 해구의 난으로 이미 옛날의 치세를 몽땅 잃은 고구려와 백제와 비슷할 것이다. 다 토지와 병의 제도가 붕괴되어서 이러한 일이 벌어졌고 해결한 왕은 한명도 없거나 그것을 해결할 능력없이 그 어리석음을 보여주거나 그걸 해결하기도 전에 죽으니 결국 신라의 일천년 사직은 그와 비슷해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실로 안타까우나 새로운 사직과 삼한의 통일과 거대하다는 발해의 유민과 왕족인 대광현까지 기대를 건 왕에게 사직을 넘겨준 것은 그야말로 불가피함에 연속일 것이며 고려는 장휘공 서희가 말한대로 신라가 아니며 고려이며 고로 당조인 조선도 신라가 아닌 옛 조선을 따르는 나라일뿐이니 항복에 왈가 왈부할 필요없으며 신라는 그저 고려 속에 남을 옛 민족이고 조선 속에 남을 옛 민족일 뿐이다.

이것에 중구난방을 통해 갑론을박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단 고려의 태조만 기억될 뿐이니 이러한 문제로 중구난방의 평을 한 것이 실로 한심스럽다.














신라 신문왕기 대문의 난에 대한 평과 나의 평 역사

○군사를 보내어 금마저(金馬渚)에서 적(賊)을 토벌하여 평정시켰는데, 제감(弟監) 핍실(逼實)과 보기감(步騎監) 김영윤(金令胤)이 죽었다. 이에 앞서 안승(安勝)의 족자(族子)인 장군 대문(大文)이 금마저에 웅거하여 반역을 도모하다가 복주(伏誅)되었다. 남은 무리가 관리를 죽이고 보덕성(報德城)에 웅거하여 배반하므로, 왕이 장사(將士)를 보내어 토벌하여 베고, 그의 사람들은 나라의 남쪽 주군(州郡)에 옮겨서 그 땅을 금마군(金馬郡)으로 삼았다. 처음에 사량(沙梁) 사람 내마(奈麻) 취복(驟福)이 아들 셋이 있었는데, 맏이는 부과(夫果)요 다음은 취도(驟徒)며 끝은 핍실(逼實)이었다. 부과와 취도는 일찍이 왕사(王事)를 위해 죽었다. 핍실이 장차 길을 떠나려고 하며 그 처(妻)에게 말하기를,
“두 형은 이미 왕사를 위해 죽어서 이름이 썩지 않고 전하여지는데, 내가 아무리 불초하나 어찌 홀로 죽는 것을 두려워하여 구차하게 살겠는가? 오늘은 바로 그대와 더불어 죽어서 이별할 때이다.”

하였는데, 싸우게 되어서는 홀로 나가 분발해 공격하여 수 십 인을 참살(斬殺)하고 죽으니, 왕이 칭탄하여 말하기를,
“취도는 능히 죽을 곳을 알아서 곤계(昆季)의 마음을 격동시켰고, 부과·핍실은 또한 의분(義奮)에 용감하여 죽는 것을 돌아보지 않았으니, 돌아보건대 아름답지 않은가?”

하고, 모두 사찬(沙飡)을 추증(追贈)하였다. 김영윤은 곧 급찬(級飡) 김반굴(金盤屈)의 아들로 세가(世家)에서 생장하여 명절(名節)로서 자부(自負)하였다. 장차 길을 떠날새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번 길에 마땅히 이름을 세워 종족(宗族)과 붕우(朋友)에게 보답하겠다.”

하고, 가잠성(椵岑城) 남쪽 7리(里)에 이르니, 적장(賊將) 대문(大文)이 진(陣)을 치고서 기다리고 있었다. 사졸(士卒)이 모두 말하기를,
“지금 흉당(兇黨)은 둥지에 든 제비와 솥에 든 고기와 같아서, 오래 버틸 마음이 없으므로 만 번 죽을 각오로 한번 싸우기를 바랄 것이다. 옛말에 ‘궁지에 몰린 도둑은 가까이 접근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그가 지쳐 있을 때에 공격하는 것이 옳다.”

고 하니, 여러 장수가 그렇게 여기고, 모두 군사를 이끌고 물러갔는데, 영윤은 유독 격분하여 싸울려고 하므로, 추종자가 말하기를,
“지금 여러 장수가 어찌 모두 살기를 도모하여, 죽는 것을 아끼겠는가? 적의 형편을 살펴보려고 하는 것인데, 당신만이 유독 싸우려고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니, 영윤이 말하기를,
“적진(敵陣)에 임하여 용기가 없는 것을 《예경(禮經)》에서 경계하였고, 전진만이 있고 퇴각함이 없는 것은 사졸의 떳떳한 직분이다. 장부(丈夫)가 일에 임하여 스스로 결정하였는데, 하필이면 덩달아 따라야 한단 말인가?”

하고, 드디어 적진으로 달려가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었는데, 왕이 칭탄하기를,
“이러한 아버지가 있어야 이런 아들이 있는 법이다.”
하며, 그 의열(義烈)을 가상하게 여겨서 증직(贈職)과 부의(賻儀)를 더하였다

[신등은 살펴보건대,]

“절의(節義)는 천하의 큰 제방(堤防)으로서, 하늘의 상도(常道)와 사람의 기강을 부식(扶植)하고 있으니, 세교(世敎)에 관계됨이 매우 큽니다. 적(敵)에 임하여 끝까지 싸우고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경우와 같은 것은, 그 절의가 지사(志士)와 충신(忠臣)의 의기(意氣)를 격동시킴이 있으니, 또한 살신 성인(殺身成仁)하는 자라 할 만한 것입니다. 신라가 고구려·백제와의 군사를 일으킨 이래로 그 풍속이, 전진하다 죽는 것을 영광으로 삼고 후퇴하여 사는 것을 치욕으로 삼았으므로, 왕사(王事)를 위하여 죽는 자를 이루 다 누누히 열거할 수 없는데, 귀산(貴山)·추항(箒項)·찬덕(讚德)의 부자(父子), 해론(奚論)·눌최(訥催)·동소(東所)·죽죽(竹竹)·비령자(丕寧子)의 부자, 김흠운(金欽運)·예파(穢破)·적득(狄得)·보용나(寶用那)·반굴(盤屈)·관창(官昌)·필부(匹夫)·아진금(阿珍金)·소나(素那)·김영윤(金令胤)·핍실(逼實)·취도(驟徒)·부과(夫果)·탈기(脫起)·선백(仙伯)·실모(悉毛)니 하는 이들은 드러난 자들이고, 그 나머지의 사절(死節)한 사람 또한 많았습니다. 백제가 망할 때는 단지 계백(階伯)만이 있었고, 고구려가 망할 때는 한 명도 사절한 자가 없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절의가 무너짐이 이와 같았으니, 어찌 능히 신라를 대적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신라도 중엽(中葉) 이후부터는 난신 적자가 잇달아 일어나서 당세에 적(賊) 견훤(甄萱)이 쳐들어오자 공경 대부(公卿大夫)가 굽실거리는 모습으로 오히려 혹은 남보다 뒤질세라 항복하였고, 김부(金傅, 경순왕)가 항복할 때에 굴복하지 않은 자는 오직 왕자(王子) 한 사람 뿐이었으니, 나라가 어찌 망하지 않겠습니까? 애석하도다! 신라가 전성(全盛)할 때에는 사람마다 죽음을 바쳐 절의를 다하였는데, 그 망할 때에는 한 사람도 몸을 바쳐서 절의를 온전히 하는 자가 없었으니, 뉘라서 국가의 흥망이 충절의 있고 없는 것에 관계되지 않는다고 말하겠습니까?”


"나의 논평 : 이것은 흡사 대문 혼자의 반란은 아닐 것이다. 안승과 대문과 관련해 이야기가 없는 것이 괴이하다. 대문이 적자적자일것이고 연령도 높지 않을 것인데 어째서 저렇게 많은 충신들이 죽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안승은 알다시피 검모잠을 참살해 신라로 온자로 그 일가는 또 신라에 반란을 일으켰다. 보통 반역을 하면 반역자는 가마솥에 삶아지고 그 가문은 없어진다고 공자께서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이상한 것이 안승의 죽음은 또 없다. 3족을 비롯해 9족을 멸했다던가 이러한 것이 없다. 이것은 필시 김부식의 누락의 실수가 컸던 것이다. 신문왕과 달리 문무왕의 첫째 실수는 대문이 있던 안승 가문을 법도와 인의로 엄히 다스리긴 커녕 왕으로 받아들여 다스림을 보여주지 않는 문무왕에게 큰 책임이 있으며, 삼한통일에서 하나의 나라를 만들어주니 둘째 실수를 문무왕이 범했으며 셋째 실수는 검모잠을 참살하고 신라에 온 과정에서 현명함을 버리고 어떠한 의문을 품지 않은 어리석음이 셋째라고 본다. 이후 난신적자들을 도처에 만들어 혼탁에 빠지고 어리석은 왕들이 줄줄이 나오며, 마침내 신라는 여러 난신적자들이 나라라 칭해 신라의 자멸은 불보듯 뻔한 것이었다. 특히 금마저는 견훤이 인근에서 반란을 일으켰을때 이후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세워 신라와 더불어 금마저 인근까지 혼탄에 빠트리고 빠트렸던 곳으로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신문왕과 같은 왕이 이를 평정해 제도의 정비를 하였으니 천년 가까이 갈수 있었던 것이다. 어떠한 의문의 제기도 없다는 것이 크나큰 실수였다. 이는 일찍이 후한말 대혼란 속에서 촉나라의 선주가 가장 덕망이 좋은 왕으로 꼽혔으나 여포와 그 일당들을 신임하여 큰 변고를 당해 후세에 큰 오점을 남긴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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